
■ 북팀장의 북레터
영화 ‘기생충’으로 세계적 거장이 된 봉준호 감독. 20여 년 전 그는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한적한 지방 소도시로 향했습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바다가 내다보이는 숙소에 머무르면 한달음에 멋진 작품이 나올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낯선 곳에서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청년 봉준호는 몇 달 만에 노트북을 접고 상경했습니다. 이때부터 집과 가까운 카페를 돌아다니며 글을 쓰는 루틴이 생겼습니다. 시끌벅적한 소음, 그리고 타인과의 교류 속에서 영감이 솟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죠.
영국 저널리스트 알렉스 존슨이 쓴 ‘작가의 방’(부키)을 읽다 봉준호의 이 일화가 생각났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부터 무라카미 하루키까지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들의 명작을 낳은 공간과 루틴에 관한 책이거든요.
저자는 작가들을 ‘방랑형’ ‘은둔형’ ‘장식파’ 등으로 분류합니다. 방랑형은 봉준호처럼 이곳저곳을 떠돌며 글을 쓰는 유형입니다. JK 롤링은 어린 딸을 유모차에 태우고 에든버러에 있는 여러 카페에서 ‘해리 포터’ 시리즈를 완성했습니다. ‘방랑은 나의 힘’이라는 듯 어디서든 펼치면 책상으로 변하는 여행 가방을 주문 제작한 아서 코넌 도일 같은 작가도 있었고요. 홀로 방에 틀어박혀 영감을 기다린 은둔형 작가로는 울프와 오노레 드 발자크가 있습니다.
울프는 뒤뜰 오두막을 ‘자기만의 방’으로 삼았고, 발자크는 모두가 잠든 밤 자정에 일어나 자택 서재와 침실에서 8시간 동안 글 쓰는 규칙을 지켰다고 합니다. 자신만의 취향으로 방을 꾸민 장식파를 보면 ‘작품은 작가를 닮는다’는 말이 새삼 와닿습니다. 소설가 데뷔 전 재즈 카페를 운영했던 하루키의 집필실은 1만 장이 넘는 레코드로 가득한데, 어떤 소재의 이야기든 재즈와 클래식이 흘러넘치는 건 음악을 들으며 글 쓰는 습관 덕분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에피소드들이 빛나는 이유는 그 자체로 특별해서가 아니라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은 작품의 비범함 때문일 겁니다. 이름 없이 사라진 작가의 공간과 루틴에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으니까요. 흔히들 오늘의 노력이 내일의 결과를 만든다고 얘기하지만, 내일의 결과만이 오늘의 노력을 돋보이게 해준다는 게 진실에 가까운지 모릅니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건 자신을 독려하고 채찍질하는 일상의 규칙에 충실할수록 더 나은 내일이 기다릴 거라는 믿음 덕분이겠지요.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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