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폐암 말기 시한부 판정을 받은 아내와 “첫사랑을 만나고 싶다”는 아내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함께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남편의 유쾌하지만 코끝 찡한 로드 무비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폐암 말기 시한부 판정을 받은 아내와 “첫사랑을 만나고 싶다”는 아내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함께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남편의 유쾌하지만 코끝 찡한 로드 무비다.


■ 안진용기자의 그여자 그남자 -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세연과 진봉

평생 전업주부로 살아온 아내
가족들 무관심에 외로운 신세
공무원으로 집안 건사한 남편
‘가부장’소리에 기댈 곳 없어

어느날 아내 시한부 선고받아
첫사랑 보고싶다며 함께 여행
어긋난 진실 알며 추억 무너져

관객 눈물 강요하는 신파 아닌
차분히 죽음 준비하는 ‘웰다잉’


참 열심히 살아왔다. 아들은 고3이다. 엄마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는 아들에게 도시락과 영양제를 챙겨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딸은 중2병에 단단히 걸렸다. 집에 오면 방문부터 걸어 잠근다. 남편은 도움이 안 된다. 애 둘 건사하느라 정신없는데, 퇴근하면 “집안 꼴” 운운하며 타박이다. 손 한번 따뜻하게 잡아주지 않는 남편은, 그야말로 남의 편이다. 어느덧 50대를 바라보는 평범한 그 여자, 세연(염정아 분)이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 공무원으로 일하며 온갖 민원에 시달린다. 사춘기에 접어든 두 아이는 도무지 아빠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고3 수험생이 있는 집에서 미역국을 끓이는 아내의 무신경이 불만이다. 가장으로서 역할을 꽤 충실히 해왔다고 생각하는데 주변에서는 ‘가부장’ 운운하며 눈을 흘긴다. 대한민국 중년 남성은 도무지 기댈 곳이 없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에 접어들었으나, 하늘은 고사하고 가족들의 속내도 읽을 수 없는 그 남자, 진봉(류승룡 분)이다.

접점 없는 두 남녀, 한때는 뜨겁게 사랑했다. 그래서 결혼했다. 하지만 지금은 남보다 못한 사이처럼 산다. 그러다 아내가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길어야 두 달이란다. 그 여자, 그 남자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아이러니한 제목을 가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다.

◇그 여자, 그 남자의 ‘만남’

19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세연의 삶에는 낭만이 가득했다. ‘밤의 교육부 장관’이라 불리던 DJ 이문세가 진행하는 ‘별이 빛나는 밤에’에 사연을 보내고, ‘예언자’로 유명한 칼릴 지브란의 시집을 품에 꼭 안고 다닌다.

방송반 선배 오빠를 좋아했다. 그 오빠도 세연을 좋아하는 눈치다.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방송에 당첨돼 목포에 사는 둘이 서울행 버스도 같이 탔다.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걷던 추억은 여전히 달콤하다. 이 대목에서 영화에는 임병수의 ‘아이스크림 사랑’이 흐른다. “사랑스러운 나만의 그대여/ 언제까지 곁에 두고파” 하지만 이 가사처럼 흐르는 첫사랑은 좀처럼 없다. 첫사랑은 빛바랜 졸업장과 함께 잊혔다.

대학에 진학한 세연은 구두를 신고 다니는 청초한 대학생이다. 그러다 시위 현장에 휘말린다. 당황한 세연을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한 남성이 낚아챈다. 세연을 구하고 얼굴을 드러낸 그 남자 대학생의 얼굴 뒤로 후광이 비친다. 그렇게 그 남자, 진봉과 사랑에 빠진다.

주머니가 가벼운 두 사람은 조조 영화를 본다. 이때 흐르는 이문세의 ‘조조 할인’의 “돈 오백 원이 어디냐고 난 고집을 피웠지만/ 사실은 좀 더 일찍 그대를 보고파”라는 가사는 절약을 핑계로 사랑을 좇던 젊은 남녀의 심리를 반영한다.

세연은 진봉을 위해 ‘군바라지’도 했다. 해를 두 번 넘겨 30개월 복무하던 시절이다. 행정고시에 7차례 실패 후 뒤늦게 입대한 진봉은 “기다리지 말라” 외쳤지만, 세연은 “너하고 잔 게 백번이 넘는다”라고 역정을 내며 진봉을 기다렸다. 그렇게 둘은 부부가 됐다. 1980∼1990년대 사랑한 연인들의 흔한 풍경이다.



◇그 여자, 그 남자의 ‘이별’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나이 먹어가면서 사람이 변한 것일까? 아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대신 상황이 변한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며 20년 가까이 살을 맞댄 세연과 진봉에게 서로는 공기 같은 존재가 됐다. ‘공기’(空氣). 글자 그대로,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는 기운이다. 그래서 통 그 고마움을 모른다. 하지만 공기가 사라지는 순간 숨이 멎듯, 세연의 폐암 말기 소식을 듣는 순간 진봉 역시 숨이 멎는 듯하다.

습관은 참 무섭다. 평소 살갑지 않던 진봉은 그런 세연을 달래기보다는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버럭 화를 낸다. 세연은 서운함에 “괜찮은지, 무섭지 않은지 왜 물어보지 않냐고?”라고 울먹인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진봉은 “내가 안 괜찮아서, 무서워서, 정말 다른 방법이 없을까 봐 무서워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고 자조 섞인 답변을 내놓는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신파와는 적절한 거리를 둔다. 죽음을 거부하는 주인공의 절규로 관객의 눈물을 강요하기보다는 차분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주변을 정리해가는 ‘웰다잉’(well-dying)에 방점을 찍는다. 그렇게 담담하게 삶에 순응하는 아내를 위해 진봉은 파티를 연다. 한평생 세연과 크고 작은 관계를 맺은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세상을 떠난 후에 치러지는 장례식에는 ‘만남’이 없다. 떠난 이의 빈자리와 그 빈자리를 그리워하고 슬퍼하는 조문객만이 있을 뿐, 정작 장례식의 주인공은 없는 공허한 잔치다. 하지만 진봉이 마련한 파티에는 주인공 세연이 있다. 내 인생의 페이지를 장식했던 이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렇게 진봉은 남의 편이 아닌 남편으로서 제 몫을 다하고, 세연은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기회를 얻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함께 노래 부른다.

“소중했던 내 사람아 이젠 안녕/ 찬란하게 반짝이던 눈동자여/ 떠난다면 보내드리리/ 뜨겁게 뜨겁게 안녕”(토이의 ‘뜨겁게 안녕’)

◇왜, ‘첫사랑 찾기’였을까?

시한부 선고를 받은 세연의 마지막 소원은 첫사랑을 만나는 것이다. 방송반의 그 선배 오빠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는 진봉은 마뜩잖다. 하지만 못 이기는 척 아내의 첫 번째 사랑을 찾아 나서는, 부부의 마지막 여행을 시작한다.

인생의 각 챕터를 마무리하며, 인간은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하물며 인생이라는 소설의 마지막 장에 들어선 세연에게 첫사랑은 미처 채우지 못한 소설의 비어있는 한 페이지다.

첫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므두셀라 증후군 때문이다. 추억을 아름답게 포장하거나,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기억만 남기려는 심리 기제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아름답다는 아이러니한 감정이다. 그래서 그 실체와 내 기억에는 꽤 괴리가 생기곤 한다. 이는 세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연은 자신이 간직하던 첫사랑의 기억과는 어긋난 진실과 맞닥뜨린다. 세연은 실망했을까? 그 반대다. 상상력으로 구축된 첫사랑의 추억이 한순간에 허물어지며, 평생 반려자로 살아온 진봉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부각된다. 진봉은 속 시원하게 웃는다. 아내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줬을 뿐만 아니라, 세연의 인생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더욱 공고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봉과 함께 ‘세연’이라는 제목을 가진 소설의 마지막 장을 매듭지은 세연은 환하게 웃는 영정사진 속 모습으로 영원히 남았다.

이제는 진봉의 몫이 늘었다. 아들의 약과 딸의 스타킹을 챙겨주고, 화장실의 휴지도 손수 간다. 그러다 사진 속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친 그 남자는 묻는다. “나 이 정도면 잘하고 있지?”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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