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이 책

한 장 한 장 그림책
이억배 지음│사계절


1995년 ‘솔이의 추석 이야기’가 놓여 있던 어느 책방의 서가를 기억한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말하지만 독서의 고속도로에 진입하려면 깨알 같은 글자들이 줄지어 선 좁은 길을 통과해야 한다. 이억배 작가는 여기에 어린이 전용도로를 놓아주었다. 25년이 지난 오늘 우리 창작 그림책이 세계에서 훨훨 날게 된 이륙의 지점을 찾는다면 이억배 작가의 작품이 중요한 자리에 있으며 지금도 변함없이 그의 자리가 빛난다. 한국 그림책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1997년에 이미 브라티슬라바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레 선정 작가였던 그는 2020년 안데르센상의 후보였으며 ‘비무장 지대에 봄이 오면’으로는 전미도서관협회(ALA)가 주관하는 배첼더어워드 어너리스트에 우리나라 최초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 장 한 장 그림책’은 14장의 그림에 동서고금의 이야기 천하를 담은 대작이다. 작가의 출발점이 추석을 둘러싼 풍속도첩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우주 만물의 풍속도첩이다. 간달프와 임꺽정이, 피터래빗과 쥐돌이가 같은 장면에 등장하고 권정생 할아버지가 책을 읽는 안동 흙집에 비무장지대의 고라니가 놀러 가는 책이다. 멸종동물 독도 강치부터 밀양의 송전탑까지 우리 생태사와 현대사가 담긴 책이며 한국 그림책의 역사서이기도 하다. 좋은 그림책을 그리려면 어린이 곁으로 가고, 시장을 찾아가고, 광장에 나가서 더 많은 사람, 더 넓은 세계를 보라고 조언하던 작가는 그동안 발굴해 온 방대한 서사와 이미지를 어린이의 한 손에 쥐여준다. 인물, 사건, 배경에 어떤 한계도 두지 않고 펼쳐지는 이 한 권의 그림책을 읽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독자는 작가를 경외하고 작가는 독자를 신뢰한다. 읽는 사람이 어디까지 깊게 이야기의 베를 짜면서 들어서게 될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책의 중심에는 어린이가 있다. 가장 어린 독자부터 이 모든 이야기를 삶으로 살아온 어른들까지, 만인에게 이야기를 만드는 자의 자유를 쥐여주는 21세기의 천일야화다. 32쪽, 2만3000원.

김지은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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