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코의 위대한 강연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진 옮김│열린책들


소설가이면서 기호학자였고, 철학자이면서 언어학자였던 ‘전방위 지식인’ 움베르토 에코의 강연집. 생의 마지막 15년간 이탈리아 밀라노 문화축제 ‘라 밀라네지아나’에서 강연한 내용을 묶었다. 에코는 혁신·거짓·음모·성스러움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며 지식과 문화의 변천사를 통렬한 문체로 주파한다.

문을 여는 에세이 ‘거인의 어깨 위에서’는 고전이 혁신의 자양분이 되는 예술·지성사의 진리를 사유한다. 흔히 혁신이란 과거에 대한 전면적 부정에서 시작된다고 믿기 쉽지만, 불세출의 천재조차 거인의 어깨 위에서만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다. 혁신가들은 바로 윗세대인 ‘아버지’가 잊은 전통에서 파괴적 창조의 근거를 찾았다. 인류 정신사를 통째로 복습해 유물론을 창안한 카를 마르크스가 그랬고, 고전주의를 다시 고찰해 인간의 얼굴을 일그러뜨린 파블로 피카소가 그랬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 등을 통해 허구와 실재 세계의 관계를 고찰한 대목도 흥미롭다. 작가는 상상력과 경험을 결합해 허구의 드라마를 창조한다. 문제는 독자가 극 중 인물의 견해를 저자의 의견으로 받아들일 때 빚어진다. 이를 ‘야만적’ 독법이라 꼬집는 에코는 허구를 창조하는 예술가들에겐 ‘참이 아닌’ 주장을 펼칠 자유가 있다고 강조한다. 이와 함께 책은 9·11 테러 당시 무수히 쏟아진 ‘거짓말’들을 살피며 “현대사회의 음모는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부담을 덜어주기 때문에 우리를 열광케 한다”고 냉소한다. 고전에서 출발한 에코의 사유는 지금 이 시대와 만나 예술·문화에 깃든 철학과 윤리, 정치와 권력의 문제에 관한 생각 거리를 남긴다. 496쪽, 2만8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나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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