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숙 씨 결혼식 사진. 정 씨의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이 아내 이영화.
정희숙 씨 결혼식 사진. 정 씨의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이 아내 이영화.


■ 보고싶습니다 - 아내 고교 동기 정희숙

정희숙 씨는 아내의 고교 동기다. 소식이 끊어진 지 어언 20년을 헤아린다. 그녀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수소문도 했지만, 주변에 근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아내도 칠십 나이를 바라보니 옛 친구가 그리운 모양이다. 1979년 우리가 결혼을 했을 때 일찍 결혼한 그녀는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다.

아내가 혼수 준비를 할 때도 그녀는 언니처럼 함께 다녔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 신혼집에 장롱을 들이는 날은 11월 중순이었지만 쌀쌀했다. 그날도 아이들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달려와 주었다. 신혼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는 부부가 퇴계로의 퍼시픽 호텔에서 식사자리를 만들었다. 2차까지 가서 우리를 축복해주었다.

그녀의 남편은 국제상사에서도 인정받은 유능한 인재 박이용 씨였다. 이후 강남에서 세무사 사무실을 차렸다며 무역센터의 내 사무실로 찾아와 명함을 놓고 간 일도 있었다. 점심시간이라 만나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었다.

정희숙 씨는 1남 3녀를 두었다. 큰딸 이름은 박은주로 이화여대를 나왔는데 40대 후반이 되었을 것이다. 둘째가 병주, 그리고 셋째는 세정이다. 세정이란 이름은 돌아가신 장인어른이 지어 주셨다. 다음번에는 꼭 아들을 낳으라는 뜻을 담았다. 네 번째는 아들인데 성진이다.

아들을 얻은 그녀의 기쁨은 컸다. 백일도 채 안 된 아들을 안고 서초동에서 택시로 망원동의 우리 집까지 달려왔다. 함께 기쁨을 나누던 순간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아내는 말한다. 내가 정희숙 씨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여 년 전이다. 살고 있던 둔촌동 주공아파트로 아내와 함께 찾아갔다. 점심 식사 후 노래방에도 갔는데 그녀의 노래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그 후에 아내는 경기도 산본으로 이사 간 그녀의 아파트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헤어질 때 전철역에서 눈물짓던 모습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내가 이 글을 쓰기로 용기를 낸 데는 이유가 있다. 결혼한 지 2년 만에 외환은행에 사표를 내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외대 통역대학원에 입학한 것이다. 당장 생활비를 조달할 길을 찾아야 했다. 그녀가 이웃집의 부동산업을 하는 건축업자를 소개해주었고 그에게 퇴직금을 빌려주었다.

높은 이자를 받아 생활비에 보탠다는 환상이 깨어지는 데는 3개월이 걸리지 않았다. 두 달까지 들어오던 이자는 이후 끓어졌다. 건축업자가 부도를 내며 원금을 날렸다. 법적인 절차를 밟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재판정에 대신 다녀오신 장인어른은 건축업자가 사기전과도 있는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

서로가 세상 물정을 몰랐던 젊었던 시절에 겪은 일이다. 어찌 되었건 친구를 도우려다 벌어진 일이다. 그녀 역시 그때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나 때문에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멀어진 것 같다. 황혼의 나이에 오랜 빚을 갚는 심정으로 펜을 들게 되었다.

이 기사를 읽으시는 분 중 정희숙 씨나 그의 가족에 대해 아시는 분이 계시면 꼭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이영화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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