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독일 뒤스부르크에선 음악축제 ‘러브 퍼레이드’에 인파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21명이 사망하고 500여 명이 다친 참사가 일어났다. 당시 뒤스부르크 시장이었던 아돌프 자워란트는 “누구 책임인지는 사법부가 판단할 일”이라고 버티다가 결국 7개월 만에 주민소환 투표로 쫓겨났다. 정무직 공무원이 사법적 책임 운운하다가 국민으로부터 정치적 심판을 받은 사례다.
2022년 한국에서도 ‘이태원 핼러윈 참사’로 158명이 사망했지만, 고위 공무원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 없이 진상 규명 공방만 한창이다. 김대기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지난 8일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참사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한 장관이나 대통령실 참모진은 없다고 밝혔다. 그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장관 바꿔라, 청장 바꿔라 이건 좀 후진적”이라고도 했다.
김 실장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무슨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고 민심 수습이니, 국면 전환이니 하면서 장관을 잘라내는 것은 그의 말마따나 후진적이다. 그러나 장관이 본인의 부처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지는 책임은 상식이요 순리다. 감세안을 내놨다가 영국 국채와 파운드화 폭락 등 금융시장 혼란을 불러온 쿼지 콰텡 영국 재무장관은 곧바로 경질됐다.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도 그 책임을 지고 취임 44일 만에 사퇴했다. 선진국이라 불리는 영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정무직 공무원들은 이렇게 본인 업무에 대한 귀속 책임을 지고 거취를 결정한다. 장관은 법적 책임뿐만 아니라 정치적 책임을 지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태원 참사의 주무 장관이면서도 ‘책임의 무풍지대’에 서 있다. 이 장관은 참사 당일 자택에 머무르다가 오후 11시 20분 첫 보고를 받았다. 참사 발생 1시간 5분 만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왜 4시간 동안 보고만 있었느냐”며 경찰을 질책했지만 이 장관에 대해선 따로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 장관도 “(경찰에 대한) 일체의 지휘 권한이 없다”며 꼬리 자르기에 급급했다. 지난 6월 경찰국을 신설하는 과정에서 “행안부 장관이 경찰청 업무를 수시로 확인하고 지휘 감독할 책임과 권한이 있다”고 했는데, 참사 책임을 따지기 시작하자 발언을 180도 뒤집었다. 비대한 경찰 조직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장관이 경찰 수사 와중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논란거리다. 과연 국민 몇 명이 이 장관 통솔 아래 이뤄진 수사 결과를 신뢰하겠나.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의 책상 팻말에 쓰인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 문구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여름 폭우를 비롯한 재해가 닥칠 때마다 “국민 안전에 대해선 국가가 무한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무한 책임이 유독 대통령 최측근인 이 장관 앞에선 ‘진상 규명’ 뒤로 밀려났다. 대통령의 반복된 사과와 재발 방지 다짐은 국민의 신뢰를 한 톨도 얻지 못한다. 측근이라도 정치적·법적 심판대에 보란 듯이 내놔야 한다. 그래야 진상 규명과 제도 개선도 힘을 얻는다. 정치와 법치는 속성이 전혀 다르다. 안타깝지만 읍참마속도 해야 하는 게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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