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MZ편집자를 만나다 - <1> 이연실 이야기장수 대표
소설가 꿈 접고 문학동네 입사
유명 편집자로 사내브랜드 론칭
‘가녀장의 시대’ 등 베스트셀러
“종이책에 쏟아지는 영상화 제안
또 다른 이야기가 돈이 되는 일
이런 게 출판의 미래 아닐까요”
책 읽는 사람이 줄고, 종이책이 점점 자리를 잃어도 여전히 한 땀 한 땀 책을 짓고, 묵묵히 작가와 독자 사이를 잇는 편집자들이 있다. 빠르고 가벼워야 하는 시대라는데, 이들은 여전히 묵직하게 그 원형을 간직한 책이 좋다. 느리고 고집스럽게 여겨지는 책 동네.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편집하는 마음’을 다지고 있는 젊은 편집자들을 만나본다.
“출판사 처음 입사할 때요? 솔직히, ‘내 청춘 이제 망했다!’ 이 생각뿐이었어요, 하하.”
책이 마냥 좋았고 오랫동안 소설가를 꿈꿨다. 하지만 혼자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에 지쳐 갔고, 스스로 직장생활이라는 ‘형벌’을 내렸다. 1년만 눈 딱 감고 돈 벌자. 그 ‘청춘’, 무려 16년을 일하게 된다.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하정우의 ‘걷는 사람, 하정우’,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 등 100여 권을 만들며 책 동네 손꼽히는 편집자로 성장했고, 올해는 사내 브랜드를 차려 온전한 ‘편집 독립’도 이뤄냈다.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게 됐고, 그래서 그 일을 몇 배 더 사랑하게 됐다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 주인공은 문학동네 임프린트 ‘이야기장수’ 이연실(38) 대표다.
지난 11일 서울 여의도 카페꼼마에서 만난 이 대표는 “입사 한 달 만에 나의 세계가 변해버렸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뜻대로 되는 게 하나 없다가도, 뜻하지 않은 선물을 주는 게 인생이다. 이 대표 앞에 새로운 문이 열렸다. 디자이너, 마케터, 인쇄 기술자 등 회사 각엔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모두 ‘책’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하고 있었다. 신기하고 즐겁고 감동적인 풍경. 그때 빼앗긴 마음, 여전히 돌아올 줄 모른다. “편집자는 고개 푹 숙이고 교정지만 보는 줄 알았는데,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일을 하더라고요. 사람한테 에너지 받는 제게는 정말 완벽한 일이었죠.”
탁월한 편집자에서 이제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갖게된 이 대표는 올해 벌써 네 권의 책을 선보였다. DM(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으로 접촉을 시도한 지 21일 만에 출간된 우크라이나 그림책 작가의 ‘전쟁 일기’로 강렬하게 ‘이야기장수’를 알렸고, 초보 편집자와 신인 평론가로 만났던 정여울 작가와의 오래 인연을 ‘가장 좋은 것을 너에게 줄게’ 속에 담았다. 또,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 출판시장 블루칩으로 떠오른 장애인 배우이자 작가 정은혜의 그림책 ‘은혜씨의 포옹’을 출간해 주목받았다. 가장 최근엔 이슬아 작가의 첫 소설 ‘가녀장의 시대’를 편집했다. 가부장제에 대안을 제시하는 흥미롭고 도발적인 스토리와 작가의 셀링 파워가 합쳐지며 책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게다가 이 책은 이 대표에게 책 만드는 일의 또 다른 기쁨과 원동력을 발견하게 해줬다. 출간하자마자 영상화 제안이 쏟아져서다. 책을 읽고 또 다른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과 제안서 속 각자의 ‘드라마’를 만나는 일이 감격스러웠다.
“종이책만 팔 줄 알았는데, 이게 다른 얘기가 되고, 그러면서 돈도 된다니! 너무 재밌잖아요!” 그는 이 지식재산권(IP) 시장을 더 열심히 파보려고 한다. 세상이 ‘사양 산업’이라 부르는 동네에 발들인 후배들에게 자신 있게 제시할 책의 가능성, 출판의 미래가 그곳에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본질과 본심은 잃고 싶지 않다. 제작 규모나 판권료가 아니라, 가장 ‘재미있는’ 제안을 고르기 위해 고심 중이다. “형태는 달라도 우린 결국 다 같은 ‘이야기 장수’ 아니겠냐”고.

이 대표는 막 들어온 원고를 읽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설렌다고 했다. 소설에 대한 미련은 없을까. 그는 “계속 그 질문을 받는다. 편집자는 작가보다 아래에 있고, 소설을 써야 나라는 사람이 완성될 것처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날은 모르겠고, 이것은 분명하다”고, “편집자는 지극히 개별적이고 또 다른 창작자로 존재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최근 유능한 편집자들이 영상이나 디지털 플랫폼으로 이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일이란 결국 각자의 선택이지만, 구조적인 문제, 철학의 부재도 원인이라는 게 이 대표의 생각이다. 시키는 일, 책 동네 용어로 ‘쳐내야’ 할 일이 많아지면 편집자는 지친다. 편집자는 자기 기획을 할 때 열정과 창의성이 극대화된다는 것. 그는 “자기 기획이 있는 한 편집자는 지쳐도 지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젊은 편집자가 성장할 수 있도록 기다려 줄 수 있는 출판사는 많지 않다. “그래도 ‘싫으면 떠나라’거나 ‘싫으니 떠나자’며 자조하지 말았으면 해요. 좋은 ‘이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아요. 그들을 찾는 일, 제가 계속할 거고요, 그러면서 조금씩 행운과 혜택이 넓고 고르게 퍼져 나가길 소망합니다.”
■ SNS 소통만으로 21일만에‘전쟁일기’출간… 우크라 작가의 절실함·기민한 편집의 산물
이 대표의 편집 스토리
우크라이나 그림책 작가 올가 그레벤니크의 ‘전쟁일기’는 ‘이야기 장수’라는 새로운 출판사의 철학과 능력을 한눈에 보여줬다. SNS 소통을 활발하게 하는 이 대표는 올가 작가의 SNS에서 그림을 본 후 재빨리 접촉을 시도했고, 21일 만에 책을 냈다.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계약 절차만 최소 한 달 걸리는 출판 관행은 무력했다. 전쟁의 참상을 알리려는 절실함과 기민한 편집 능력이 만나 탄생한 책. 서둘러 미안하다는 이 대표에게 작가는 “우리 사이엔 어떤 문제가 생겨도 해결할 믿음이 있다”며 안심시켰다. 이 대표는 책을 만지며 “곧 전쟁이 끝나길 기원하며 만든 책인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가녀장의 시대’에도 애틋한 일화가 있다. 문학동네에서 이슬아 작가의 전작들을 편집했고, 그의 오랜 팬이었던 이 대표는 이 작가의 첫 소설을 꼭 직접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워낙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데다가, 이 작가 인생에 특별한 전기가 될 소설이다. 보다 큰 출판사에서 만드는 게 나을 것 같은 복잡한 심경도 있었다. 이 대표는 “내가 정말 잘 만들 수 있지만 나를 선택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을 작가에게 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펑펑 울었다. “저도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기대와 열망이 크고, 확신도 있지만 내려놓아야 할 때 나오는 그런 눈물이었을까요?” 그러던 중 이 작가의 전화를 받고는 아예 통곡했다고. “대표님, 우리 같이해요!”라는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올해 안에 2∼3권의 책을 더 선보일 예정이다. 궁금해서 물으니 “영업 비밀”이라고 말을 아끼면서도, 그 중엔 만화도 있고, ‘책에 대한 책’도 있다고 귀띔했다. 무엇보다 “독자들이 책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어 줄 책들”이라고. 그게 뭐든, 그 책들은 그가 명함에 새기고 다니는 이 구절, 그 순전함을 오롯이 담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행운을…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노력한 만큼의 성공을.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며 보호할 수 있기를.” (만화 ‘중쇄를 찍자’ 중에서)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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