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전債 금리 하락해 시장 숨통
금융 당국 대비 못해 돈줄 경색
이번엔 예금금리도 제한 왜곡
노골적 시장 개입 후유증 불가피
금융사 모럴해저드만 키울 우려
尹정부 금융개혁 벌써 후퇴 꼴
꽁꽁 얼어붙었던 자금시장이 다소 풀렸다. 무엇보다 돈줄 경색의 주범인 한국전력 회사채의 금리가 내리는 것이 긍정적인 신호다. 단기 자금시장 지표인 기업어음(CP) 금리도 상승세가 꺾였다. 늦었지만 정부의 비상 대책들이 숨통을 열었다는 평가다. 기획재정부·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등 관련 부처와 한국은행까지 총동원돼 지난 10월 ‘50조 원+α’ 유동성 공급을 시작으로 5조 원 규모의 채권시장안정펀드, 한전채·은행채 발행 축소 등을 쏟아낸 것이 효과를 봤다. 자금 수요가 많은 연말에 금융시장이 일단 안정을 찾았으니 다행이다. 돈줄이 막히는 극단적인 사태는 모면한 것 같다.
그렇지만 자금 경색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정부가 사전 대비를 못 한 탓일 뿐이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문제의 본질이 레고랜드 CP가 아니라 한전의 부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에도 전기요금 인상이 없다는 억지를 관철하려고 한전의 요금 인상을 막았던 게 재앙의 출발점이다. 그 결과, 한전은 올해 적자만 30조 원을 넘어 이미 누적 규모 60조 원 이상의 채권을 찍어 자금을 빨아 갔다. 윤석열 정부의 경제팀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추경호 경제부총리와 이창용 한은 총재는 복합 위기라며 공조를 강조했지만 이런 지경이 돼버렸다. 특히, 평생 금융 전문가라던 김주현 금융위원장, 검찰 출신인 이복현 금감원장 등 금융 수장은 더욱 책임이 무겁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더욱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은행에 예금금리를 낮추라고 대놓고 압박한다. 은행이 높은 금리로 자금을 유치하면 제2금융권 자금난이 가중된다는 것이다. 예금금리가 오르면 대출금리도 올라 가계 부담이 커진다는 이유도 든다. 김 위원장이 과당경쟁 자제, 이 원장이 자금 쏠림 경고를 강조하는 것이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한은이 기준금리를 올리면 예금금리도 대출금리도 인상 압력을 받는 게 당연하다. 실질금리가 마이너스인 상황에서 은퇴 생활자 등이 피해를 보게 되는 측면도 외면하고 있다. 오히려 예금금리 통제는 저축은행·보험회사로도 확산하는 추세다. ‘신(新)관치금융’이라는 비판이 점점 커진다.
금융 당국의 고민은 이해한다. 특히, 증권사를 중심으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산유동화증권 상환 문제가 시한폭탄처럼 도사리고 있다. 수습하려면 금융시스템의 정상 작동이 전제돼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금융 당국은 선을 넘고 있다. 이미 일부 증권사의 부실 채권 상환을 위해 정상적인 증권사 자금을 투입했다. 한은도 자금을 댔다. 부동산 투자를 위해 채권을 대량 찍은 증권사의 부실을 막기 위해 한은 발권력까지 동원하는 것은 모럴 해저드에 면죄부를 주는 셈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형편이다. 여기에 예금금리까지 통제하고 나섰다. 은행의 예대 마진을 불려 주는 결과를 부를 수 있다. 앞서 은행의 대출 여력을 늘린다며 예대율 규제를 잇달아 풀어 줬다. 앞으로 은행이 손을 내밀면 금융 당국이 과연 뿌리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정부의 금리 통제는 직접적인 가격 개입과 똑같다. 아무리 비상 상황이라도 이런 관치는 뒤탈을 초래한다. 과거 MB 정부는 저금리의 미소금융을 강권해 금융권을 뒤흔들었다. 이자 상한도 낮췄다. 그렇지만 대부업과 사채는 여전했다. 은행 대출 문턱이 더 높아져 자금이 급한 서민들은 더 비싼 금리를 주며 이들을 찾아야 했다. 노골적인 정부의 개입은 시장의 복수를 부른다.
더구나 금융회사는 대부분 상장회사이고 외국인 주주도 투자자도 많다. 정부가 게임 규칙을 만드는 이상으로 개입하면 화를 자초하게 된다. 특히, 은행은 면허산업이다. 금융 수장들이 은행장들을 수시로 불러 모으는 것부터 부적절하다. 완장을 차고 호통을 치던 과거를 재현하려 들면 안 된다. 은행장과 금융지주 회장 선임에 정부 개입설이 나오는 것도 개운치 않다. 아프리카 수준도 안 된다고 지탄받았던 게 한국 금융업이다. 정부가 대놓고 개입하는 일이 반복되면 아프리카로부터도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다. 관치금융은 달콤할지 모르지만 독배다. ‘착한 관치’는 없다. 윤 정부의 시장 중심 경제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금융 개혁은 윤 정부의 중요한 국정 과제다. 지금 같이 가다간 개혁은커녕 몇 년 뒤로 후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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