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 논설위원

근대적 의미의 탄핵을 처음 당한 것은 상해 임시정부의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임시헌법 제21조 14항에 따라 1925년 탄핵 됐는데 이유는 3가지였다. 의정원 승낙 없이 국경을 벗어날 수 없다는 헌법 규정을 어기고 5년 6개월 재임 중 6개월만 상하이에 체류했고, 임시정부 정체성을 부정했으며 구미위원회로 들어온 독립자금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헌헌법도 제46조를 통해 ‘대통령, 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 심계원장(현 감사원장), 법관 기타 법률이 정하는 공무원의 그 직무수행에 관하여 헌법 또는 법률에 위배한 때 국회는 탄핵소추를 결의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의결 요건은 ‘의원 50인 이상의 발의에 재적의원 3분지 2 이상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지 2 이상의 찬성’으로 현행 헌법의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발의에 재적의원 과반수(대통령은 3분의 2 이상)의 찬성’보다 엄격했다.

현행 헌법은 탄핵 사유를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한 경우’라고 두루뭉술하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탄핵심판과 달리 탄핵소추는 법리적인 절차가 필요 없는 정치적 행위다. 따라서 형식적 요건만 충족하면 언제든 발의·가결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 수립 이후 70여 년간 탄핵 제도는 엄격하게 운영됐다. 모두 21건의 탄핵소추안이 발의됐지만, 국회에서 가결된 것은 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과 임성근 판사 등 3건에 불과했고 그나마 박 전 대통령 건만 탄핵심판에서 인용됐다.

이는 탄핵소추권이 헌법에 보장된 권리지만 그 권리를 적정하게 행사했는지에 대해 추후 선거를 통해 국민의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4년 3월 12일 노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반발 속에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 합작으로 가결됐으나 역풍은 거셌다. 한 달여 후에 치러진 제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과반인 152석을 획득한 반면, 새천년민주당은 9석에 그쳐 제4당으로 전락했고 탄핵 주도 정치인들은 대부분 정계를 은퇴했다.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가 시작도 되기 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일요일에 강행 처리한 더불어민주당에서 탄핵 주장이 나오고 있다. 국회 절대다수 의석이란 막강한 권력을 남용하면 그 대가는 더욱 혹독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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