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한 국채 매입해온 일본
마침내 한계점 도달한 듯
판도라의 상자 드디어 열리나
일본 정부는 빚이 많다. 최근 자료인 2021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262.5%다. 정부 빚이 GDP의 세 배가 넘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단연 톱이다. 빚이 많아서 2010년 남유럽 재정위기를 촉발했던 PIIGS 국가들, 포르투갈(127.4%), 이탈리아(150.8%), 아일랜드(56%), 그리스(193.3%), 스페인(118.4%)보다도 월등하다. 한국은 46.9%에 불과하다.
웬만한 나라가 이 정도 빚이면 무너질 만도 하다. 국채 금리는 오르고 통화 가치가 폭락, 물가가 급등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본은 그럭저럭 버텨왔다. 어떤 비밀이 숨어있어서일까. 비밀은 단순하다. 일본 중앙은행이 일본 정부가 빚을 지며 발행한 국채를 몽땅 사들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수익률곡선통제(YCC·Yield Curve Control) 정책을 통해서다.
◇전 세계 유례없는 일본의 금융정책 = YCC는 일본 정부가 발행한 10년물 국채 금리에 상한을 두는 정책이다. 상한 이상으로 국채 금리가 오르면(국채 가격 하락) 중앙은행이 큰손으로 등장, 국채를 매입해 금리를 떨어뜨린다. 이 같은 방법을 통해 정부는 이자 걱정 없이 안심하고 국채를 거의 무제한으로 발행할 수 있었다. 현재 일본 중앙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자국 국채는 50%가 넘는다. 전 세계에 유례가 없다.
일본 정부가 YCC를 쓰기 시작한 건 2012년 초장기 불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베노믹스(Abenomics)’를 표방하면서부터다. YCC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궁극적으로 경기 부양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빚을 내 돈을 펑펑 쓰고, 중앙은행이 국채를 사들이며 시중에 공급한 자금도 경기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 시중 금리가 낮게 유지된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시장에 반하는 정책을 마냥 유지할 수만은 없다. 지난해부터 탈이 날 조짐이 나타났다. 지난해 12월 기준 일본 소비자물가는 4.0% 올라 41년 만에 최고 수준을 나타냈다. 엔화 가치는 역대 가장 낮은 수준까지 폭락했다. 이에 따라 수입액이 대폭 늘며 지난해 일본의 무역적자는 19조9713억 엔(약 192조 원) 기록했다. 비교 가능한 통계가 있는 1979년 이후 최대치다.
그러나 극성스러운 글로벌 자본의 ‘애니멀 스피릿(Animal Spirit)’을 더 자극한 꼴이 됐다. 일본 중앙은행이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자 글로벌 자본은 일본 국채를 대거 공매도 하고 나섰다. 일본 중앙은행이 추후에 금리 상단을 더욱 올릴 수 있다고 본 글로벌 자본이 국채 가격 하락에 베팅하고 있다는 의미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닛케이) 신문에 따르면 일본 중앙은행이 금리 방어 차원에서 1월 한 달 동안 사들인 국채는 총 17조 엔으로 사상 최대 규모다. 그럼에도 일본 10년물 국채 금리는 일본 중앙은행이 정한 0.5%를 조금씩 넘어서고 있다. 둑이 터지기 직전 조금씩 물이 새는 단계다.
급기야 국제통화기금(IMF)도 일본 중앙은행에 YCC의 재고를 주문하고 나섰다. 현재 0.5%로 고정된 10년물 국채 금리 상단을 추가 상향하라는 내용이 골자다. IMF는 "단기적으로 상당한 인플레이션 상승 위험성이 있다"고 권고의 이유를 설명했다. IMF는 영국이 감세 정책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의 위기감이 높아진 지난해에도 영국 정부에 이례적으로 정책 재고를 권고한 바 있다.
◇4월 이후 마침내 판도라의 상자 열리나 = 시장에서는 4월을 주목한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 중앙은행 총재가 퇴임을 앞두고 10년물 국채 금리 상단을 1%까지 높이거나 아예 YCC를 폐기할 수 있다는 관측이 잇따르고 있다. 후임 총재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구로다 총재가 총대를 멜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일본이 YCC를 폐기하거나 국채 금리 상단을 높일 경우 글로벌 시장에도 충격이 예상된다. 낮은 금리에 실망해 자국을 떠나 해외로 향했던 일본의 막대한 민간 자금과, 싼 엔화 금리로 돈을 빌려 해외에 투자한 ‘엔 캐리 트레이드(Yen carry trade)’ 자금이 글로벌 자산시장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는 은행, 연기금 등 일본 투자자들이 해외 주식, 채권에 투자한 자금을 3조 달러가 넘는 규모로 추산했다. 일본의 미국 주식, 채권 보유량만 현재 1조5000억 달러 이상이다. 미국 GDP의 7.3%에 해당한다. 일본이 네덜란드에 투자한 금액은 GDP의 9.5%에 달한다. 호주(8.3%), 프랑스(7.5%), 영국(4.6%), 벨기에(4.5%), 캐나다(4.1%) 투자된 일본 자금도 엄청나다.
프리야 미스라 미국 TD 증권 투자전략가는 블룸버그에 "일본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수정으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 세계 금융 환경이 큰 폭으로 변화할 것"이라면서 "시장은 잠재적으로 구로다 총재가 퇴임할 때까지 10년물 금리 변동 상한선 1%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임정환 기자
주요뉴스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