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 지식카페 -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15) 최고 인재 모였던 승정원

우두머리 도승지 등 정보파악 위해 다른 직책 겸직…‘과다 업무’ 탓 오래 못했고 그만두면 ‘종2품 이상 벼슬’ 보장받아
주서 2명은 ‘승정원일기’ 쓰고 암행어사 임무, 서리 28명은 비밀서찰·민심 파악 심부름… 임금의 눈·귀 역할 해


내명부와 내시부가 왕의 생활을 돕는 기관이라면 승정원(承政院)은 왕의 정치를 돕는 비서기관으로 왕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배치된 곳이었다. 승정원은 조선 초에는 군사 기밀과 왕명을 출납하던 중추원에 속해 있었다. 이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이은 것이다. 고려에서는 중추원에 좌승선과 우승선을 두고, 그 아래에 부관들을 거느리도록 했다. 또 한림원에는 학사와 승지가 있었고, 승지들의 근무처인 승지방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이 개국된 뒤 중추원에 도승지와 좌우승지, 부승지를 두었는데, 정종 때인 1400년에 승정원을 독립시켜 조선의 최고 비서기관으로 재탄생시켰다.

승정원을 독립시킨 것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은 당시 세자로 있던 태종 이방원이었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뒤에 왕권을 한층 강화할 목적으로 의흥삼군부와 승정원을 합쳐 승추부를 만든다. 군무와 정무를 일원화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후 왕권이 안정되자, 1405년에 승추부는 병조와 결합시키고 승정원을 다시 독립시켰다. 이후 승정원은 조선 말까지 왕의 정무 비서기관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승정원에는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 등 6명의 승지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정3품 당상관들이었다. 승정원의 여섯 승지는 각자 육조의 업무를 분할하여 맡았다.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방,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동부승지는 공조를 맡았으나 때론 능력에 따라 업무를 변경하기도 하였다. 승지의 품계는 정3품이었지만 종2품을 지낸 관리가 승지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도 장관을 지낸 사람이 대통령 수석비서관에 임명되는 것과 비슷하다.

왕명을 받고 내보내는 과정에서 왕은 승지에게 의견을 묻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승지들은 자신의 견해를 말하기도 하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임금께 직접 자신의 의견이나 여러 신하의 의견을 아뢰는 조언자의 역할도 하였다. 승지들은 이와 같은 고유 업무 외에도 다른 기관의 직책을 겸하기도 했다. 왕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경연참찬관, 역사에 관한 기록을 맡은 춘추관 수찬관을 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도승지는 임금의 경연과 서적을 관리하는 홍문관 직제학을 겸하기도 하고 옥새, 병부 등을 맡아보던 상서원정을 겸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승지 중에는 내의원, 상의원, 사옹원의 부제조를 겸하기도 하였으며, 형조를 맡은 승지는 죄수를 관리하는 전옥서제조를 겸하기도 했다.

이처럼 승지가 여러 가지 업무를 겸직한 것은 왕을 제대로 보필하기 위해 다양한 정보가 필요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명의 출납을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승지들은 이렇게 겸직으로 얻은 다양한 정보를 통하여 궁궐 내부의 사정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으며, 좀 더 정확한 정보와 의견을 왕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직책이 많은 만큼 업무량도 많았다. 그 때문에 승지는 오랫동안 지속할 수 없는 자리였다. 또 고생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승지를 그만두면 항상 종2품 벼슬 이상을 보장받았다.

조선 역사에서 국가에 많은 공헌을 했거나 정승을 했던 사람 중에는 승지 출신이 아주 많다. 대표적인 인물을 열거해보면 세종 시대의 명재상이었던 황희와 맹사성이 모두 승지 출신이었고, 또 6진을 개척한 김종서도 승지 출신이었으며, 뛰어난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율곡 이이, 조선 중기의 명재상 오리 이원익, 선조 대의 명재상 서애 유성룡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인물이 승정원을 거쳐 유명한 정치가가 되었다. 이 때문에 승정원은 최고의 인재가 모이는 곳이었고, 출세의 전당이기도 했다. 특히 승정원의 우두머리인 도승지는 출세를 보장하는 직책이었다.

조선이 개국된 뒤 가장 먼저 도승지가 된 인물은 안경공이었다. 안경공은 고려 왕조 때에 뛰어난 문인이었던 안축의 손자이며, 조선 개국공신인 안종원의 아들이었다. 그는 도승지에서 물러난 뒤에는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이 되었으며, 이후 한성부 판사, 집현전 대제학, 흥녕부원군 등의 벼슬을 지냈다.

안경공의 경우만 보더라도 도승지 직책을 거친 후 화려한 관직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안경공이 도승지 직책을 수행한 기간은 1392년 7월부터 1393년 3월까지 8개월 정도였다. 그를 이어 도승지에 오른 인물은 이직이었는데, 이직은 1393년 4월부터 9월 12일까지였다. 도승지에서 물러난 이직은 사헌부 대사헌, 의정부 지사, 이조판서, 의정부 찬성사 등을 거쳐 세종 때인 1424년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 벼슬에 오르게 된다.

이직에 이어 도승지가 되었던 한상경도 의정부 참찬과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오른다. 태종 때에 도승지로 유명했던 박석명은 태종의 어릴 때 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사람 보는 눈이 탁월하여 태종에게 황희를 승지로 천거하기도 했는데, 잘 알려져 있듯이 황희 역시 도승지를 거쳐 세종 대의 대표적인 정승이 되었다. 이렇듯 승정원 승지 자리는 조선의 문관들이 재상의 반열에 오르기 전에 거치는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승정원에는 승지 외에도 정7품의 주서 2인이 있었고, 서리 28인이 있었으니 규모가 꽤 큰 비서실이었다. 주서의 역할은 승정원의 기록인 ‘승정원일기’를 쓰는 일을 담당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직책이었다. ‘승정원일기’를 바탕으로 실록이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승정원의 주서는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고, 사초 기록이나 실록 편찬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집안도 좋고 유능한 인물들이 배치되었다. 승정원 주서는 ‘승정원일기’를 쓰는 임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왕의 특명을 받고 지방으로 파견되어 특별한 일을 조사하는 임무도 자주 맡았다.

태종은 재위 12년 8월 10일에 승정원 주서 김자와 환관 노희봉을 시켜 풍해도의 농사 상황을 알아보도록 했다. 이때 태종은 이런 말을 한다. “풍해도 각 고을에서 풍우(風雨)로 곡식이 상한 형편을 실지로 보고하지 않아서 종잡기가 어렵다. 만일 부실(不實)한 자가 있게 되면, 즉시 잡아다 서울로 압송하라. 내 마땅히 그 연고를 묻겠다.” 풍해도는 곧 지금의 황해도인데, 태종은 당시 이곳의 농사 상황 보고에 의문을 품었다. 풍해도의 관찰사 보고가 다른 도에 비해 매우 늦었고, 바람으로 인해 손실된 논밭도 다른 도에 비해 너무 많았던 까닭이다. 그래서 승정원 주서 김자와 승전색 노희봉에게 특명을 내려 그곳의 상황을 살펴 관찰사의 보고와 비교해서 보고하라고 했던 것이다. 일종의 암행어사 임무를 주었던 셈이다.

김자는 풍해도의 상황을 살핀 후 이런 보고를 하였다. “논은 모두 충실하나, 간혹 10분의 1, 2가 손실되고, 밭은 10분의 1, 2에서 간혹 10분의 3, 4까지 손실되었습니다.” 이 보고서를 받고 태종은 몹시 화를 내며 지시했다. “관찰사·경력·수령이 다 손상되었다고 보고한 것은 실로 나를 속임이니, 마땅히 모두 죄주도록 하라.” 이렇듯 승정원 주서는 임금이 특별히 알아볼 일이 있을 때, 지방으로 파견되어 임금의 눈과 귀가 되는 역할도 했다. 세종은 재위 5년 6월 10일에 승정원 주서 이극복을 고양현에 파견하였다. 당시 고양현에 굶어 죽은 사람이 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세종은 그 진위를 알아보도록 했던 것이다. 주서 이극복이 고양현에 가서 그 내막을 알아보니, 여종 모란과 두 아들이 너무 굶주려 부종이 생겼고, 어린아이 하나가 굶어 죽은 사실이 있었다. 이에 세종은 의금부에 명령하여 고양현 현감 김자경에게 곤장 80대를 치게 하였다.

세조 때에는 승정원 주서를 유구국 사신에게 보내 술과 고기를 내려주었고, 겨울에 날씨가 추워지자 의금부와 전옥서의 죄수들이 입고 있는 옷 두께를 살펴보고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승정원 주서는 임금의 특명을 받아 시행하는 일이 많았다. 한마디로 그들은 임금의 눈과 귀 노릇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승정원 주서 임무를 마치게 되면 반드시 벼슬을 올려 중요한 직책으로 이동하게 하였다.

승정원 주서뿐 아니라 서리들도 임금의 눈과 귀 노릇을 하였다. 승정원 서리들은 대개 대를 이어 승정원에 근무하곤 했는데, 그 때문에 승정원에는 왕과 친분이 두터운 서리가 많았다. 그래서 왕들은 아끼는 신하에게 서찰을 내리거나 특별한 당부를 할 땐 승정원 서리를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신하들과 비밀 서찰을 주고받았던 정조의 심부름꾼들도 하나같이 승정원 서리들이었다. 또한 임금들이 백성의 동향을 파악할 때도 서리들을 동원하는 일이 많았다. 그만큼 승정원 서리는 왕이 믿고 의지하는 수족 같은 존재였다.

작가

■ 용어설명 - 당상관

조정의 회의에서 당상(堂上·임금이 있는 대청마루)에 앉을 수 있는 관료로 고관대작의 반열에 올랐음을 상징하는 기준이었다. 조선왕조에서는 같은 정3품 관리도 당상관과 당하관으로 나눴는데, 당상관과 당하관은 차림새나 대우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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