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스트 리더십 - 절간 같았던 ‘한국은행’을 바꾼 이창용 총재

예측 가능한 시스템 구축 소신
美 Fed처럼 금리 예상표 안내

“많은 자료들 불확실성 이유로
분석 안 하는 건 직무유기” 신념
정책 아이디어 정부에 전달 등
싱크탱크 역할하며 전진 패스
존재감 없던 韓銀寺에 역동성

수평적 외부지향 조직문화 선호
매주 현안포럼 열고 대화·토론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달라질 것인가, 아니면 한은이 변화할 것인가.’

한은에 정통한 관계자는 6일 “이 총재든, 한은이든 둘 중 한쪽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난해 4월 부임한 이 총재가 줄곧 중대 변화를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계는 이 총재가 이끄는 한은의 변화에 대해 “절간처럼 대내·외 소통에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존재감이 없다는 뜻에서 ‘한은사(韓銀寺)’로 불렸던 한은이 ‘공격 축구’를 구사하는 역동적인 조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한은사는 1990년대 언론이 붙여준 별명이다.

이 총재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모호성을 미덕으로 삼아온 기존 총재들과는 180도 다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대외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때는 리스크(위험)를 무릅쓰더라도 직설적이고 명쾌한 화법을 구사한다. 기존에는 시도한 적이 없던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점도표’(금리인상 예상표)를 떠올리게 하는 ‘포워드 가이던스’(선제 안내)를 과감하게 행동에 옮긴다. 지난해 5월부터 9개월째 5% 이상의 높은 상승률을 이어온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사상 첫 7회 연속 금리 인상을 단행할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었다. 어느 때보다 불확실성이 높아 자칫 틀렸다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었지만, 불안에 떠는 시장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예측 가능성’을 높여 주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학계 평가는 호불호(好不好)가 엇갈린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문화일보와 통화에서 이 총재의 실험에 대해 “시장에 불확실성을 없애주는 바람직한 시도”라고 평가했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시행착오가 있긴 하지만, 기대인플레이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비표준적인 통화정책 수단인 포워드 가이던스의 취지를 살리는 통화정책 기법의 발전으로 본다”고 말했다. 반면 일각에서는 잘못된 신호로 공신력이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한다.



◇“앞을 보는 천리안 확보가 궁극의 목표”= 이 총재가 변화를 모색하는 이유에 대해 직접 설명한 적이 있다. 지난해 10월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 강연에서 “한은은 대외요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 소규모 개방경제라는 특성을 고려해 미래의 통화정책 경로에 대해서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언급하며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왔지만, 금융통화위원의 생각을 시장과 보다 투명하게 소통하기 위해 포워드 가이던스를 제시하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7월 통화정책방향 회의를 마친 뒤에는 향후 속도 조절 방침을 시사하고, 같은 해 11월과 올 1월에는 위원별 최종금리에 대한 단기 입장을 자세하게 공개하기도 했다.

이 총재가 원하는 실험의 끝은 ‘1∼2년 안을 내다보는 천리안 확보’다. 한국인 최초의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 국장을 지낸 이코노미스트다운 구상이다. 그는 현재에서 더 나아가 경제 성장률, 물가 등 거시경제 지표를 기존의 반기 대신 분기별로 쪼개 정교하게 예측하는 시스템 구축을 구상하고 있다. 예측치와 전제 조건을 바탕으로 금통위원들이 금리 흐름을 전망토록 하고 이를 세분화해서 공개하는 ‘한국식 점도표’ 시스템을 완성하는 게 궁극의 목표다. 새로운 거시경제 모형을 바탕으로 예측력을 얼마나 정교하게 높이느냐에 따라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한은의 공신력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공격축구’ 구사하는 행동파 = 기존의 한은이 ‘수비 축구’를 위주로 했다면, 이 총재의 한은은 ‘공격 축구’를 구사한다. 이 총재는 내부에 “정책 논의 과정에서 적극적인 전진 패스를 하자”고 독려한다. 특히 독립기관으로서의 한은이 싱크탱크 역할까지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본연의 업무영역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주문한다. 정부 소관사항이라 하더라도 한은이 정책 아이디어를 당국에 적극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평소 “한은에 많은 자료가 있는 데 불확실성을 이유로 분석을 안 하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소신을 피력한다. 같은 맥락에서 한은은 기준금리 결정을 위한 금통위 회의 시 논의된 자료들을 블로그, 금융·경제 이슈 등의 형태로 대외에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7월 금통위 회의부터는 금융·경제 이슈 분석 이름으로 검토했던 자료들을 언론 등을 통해 공개한다. 또 2022년 5월부터 12월 사이의 관련 블로그 게재 건수는 총 34편에 달한다.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며 정책을 직접 책임졌던 이 총재는 금융시장 불안 해소를 위한 직접 개입도 불사한다. 레고랜드발 자금시장 경색 사태 이후 단기금융시장에서 쏠림현상이 발생하였을 때는 적격담보증권 확대와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 등과 같은 대책을 선제적으로 실시하게 했다. 달러 강세로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 중반까지 급등했을 때도 외환 시장을 안정화하는 데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국민연금과는 14년 만에 100억 달러 규모의 통화 스와프(맞교환)를 단행토록 했다.

◇‘시끄러운 한은’으로 = 이 총재는 한은의 조직 문화를 바닥부터 흔들고 있다. 조용한 절간 분위기에서 벗어나 시끄러운 한은이 되라고 요구한다. ‘수평적 외부지향적 조직문화’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게 이 총재의 생각이다. 조직 업무에 관해서는 ‘계급장 떼고’, ‘할 말은 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자고 강조한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따고 오랫동안 국제기구에서 경험을 쌓아온 이 총재는 뼛속까지 ‘합리주의자’다. 오랫동안 ‘동양식의 완곡 화법’에 젖은 조직문화를 바꾸기 위해 속도를 낸다. 취임 직후부터 대화와 토론 중심의 조직문화 정착을 위해 ‘주간현안포럼’을 신설토록 했다. 긴장감을 불어 넣기 위해 여성·비공채 출신 등의 발탁 인사도 주저하지 않는다. 지난해 7월 인사 시 관리자급(1∼3급) 승진자 중 여성 비중(20.8%)은 처음으로 20%를 웃돌았다.

◇“올해가 본 시험대”= 2년 차에 접어든 이 총재는 이제 ‘본 시험대’에 올라서고 있다. 전문가들은 올해 통화 정책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어느 해보다 어렵고 중요한 해가 될 것으로 본다. 취임 후 가파르게 올린 기준금리 인상의 후폭풍은 6개월∼1년의 시차를 두고 시장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한은의 최대 과제인 물가 안정 문제는 소폭 둔화세로 진정돼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이제부터는 한층 짙어진 경기침체 우려와 중국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에 따른 물가 불확실성과 싸워야 한다. 김정식 교수는 “고금리·고물가 상황에서 앞으론 경기침체와 부동산 버블 붕괴 우려 등을 어떻게 잘 컨트롤 하느냐가 이 총재의 최대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60년 충남 논산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미국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대통령직인수위 경제1분과위원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아시아개발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국제통화기금 아·태국장 △한국은행 총재 △바젤국제결제은행 이사

이관범·김지현 기자 focus@munhwa.com


■ 글로벌 경제계 ‘인맥왕’

서머스 前 미국재무장관이 IMF 근무 추천… 윤종원·은성수와 서울대 경제 80학번 동기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미국 유학 생활과 국제기구 근무 경험으로 해외 주요 경제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고, 국내 경제계에도 두루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자타공인 인맥왕이다.

하버드대 박사 과정 지도교수였던 로런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과의 인연은 특별히 깊다. 서머스 전 장관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재무장관, 버락 오바마 행정부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을 역임하고 하버드대 총장을 지낸 거물 관료이자 학자다. 이 총재가 2014년 한국인 최초로 국제통화기금(IMF) 고위직인 아시아·태평양 국장에 오른 데에는 서머스 전 장관의 ‘제자 사랑’과 신뢰가 있었다. 서머스 전 장관은 2013년 10월 한국 방문 당시 박근혜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이 총재를 IMF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IMF에서 함께 근무한 기타 고피나트 수석 부총재, 올리비에 블랑샤르 전 수석 이코노미스트와 연이 깊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과도 친분이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해 ‘닥터 둠(doom·파멸)’으로 불리는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하버드대 동문이다. 이 총재는 아시아개발은행(ADB) 수석 이코노미스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준비위원회 기획조정단장도 역임했다. 이 총재는 지난해 미국 ‘잭슨홀 미팅’에서 세션 발표를 맡았는데 학자가 아닌 중앙은행 총재가 발표자로 나선 것은 처음이라 주목받기도 했다.

국내 인맥도 눈길을 끈다. 윤종원 전 IBK기업은행장, 은성수 전 금융위원장과 함께 ‘서울대 경제학과 80학번 3인방’으로 불린다. 금융위 부위원장 출신의 손병두 한국거래소 이사장과 청와대 일자리수석을 지낸 정태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인창고·서울대 후배다.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이 총재 임명 당시 “제일 아끼는 후배”라고 밝히며 총재직 수행을 격려한 바 있다. 이 교수와 이 총재가 함께 쓴 ‘경제학 원론’은 필독서로 통한다.

본관이 덕수로 같은 이주열 전 한은 총재와도 사석에서 편하게 만나는 사이다. 이 총재는 신사임당의 넷째 아들이자 율곡 이이의 동생인 조선 중기 화가 옥산 이우(1542∼1609년)의 16대 종손이다. 5000원권 뒷면에 사용된 수박과 맨드라미 그림은 이 총재 가문이 강릉시에 기증한 신사임당의 초충도 병풍의 일부다. 이 총재도 대대로 물려받은 유물 500여 점을 강릉시에 기증해 2008년 오죽헌 율곡 기념관에서 특별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거시경제학자 사이에서는 ‘신장이 큰 총재는 기준금리를 많이 올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 총재는 키가 192㎝로 장신이다. 1980년대 초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리며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명성을 날린 폴 볼커 전 Fed 의장도 약 2m에 이르는 거구였다.

김지현 기자 focus@munhwa.com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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