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식카페 - (23) 튀르키예 지진과 인간의 사랑
묵적 ‘묵자’
이로움을 추구함은 인간 본성
별도의 수양 없어도 실천 가능
서로에게 충분히 이익 되는데
굳이 혈연 따질 필요는 없어
동정 아닌 사랑으로 재난 도와

파괴된 평화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묵자라면 ‘겸애(兼愛)’와 ‘교리(交利)’가 필요하다고 답했을 것이다. 그는 ‘반전평화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로, 두루 동등하게 사랑한다는 뜻의 겸애와 서로 이로움을 주고받는다는 뜻의 교리를 공동체 평화 유지의 주춧돌로 꼽았다.
두루 동등하게 사랑한다고 함은 피붙이와 피붙이가 아닌 이들을 똑같이 사랑한다는 얘기다. 부모나 자식이라고 하여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묵자의 겸애는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패륜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인간이 자기 피붙이를 더 사랑함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윤리적으로 정당하다는 견해였다. 반면에 묵자는 사랑에 차등을 두었기 때문에 갖은 폐단이 발생하게 된다고 보았다.
묵자가 차등 없는 사랑을 주장한 까닭은 그래야만 진정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로 차등 없이 사랑을 하면 서로가 이롭게 된다. 마찬가지로 서로를 이롭게 하면 서로 차등 없이 사랑하는 것이 된다. 묵자가 겸애와 교리를 짝지어 강조했던 이유다. 그러니까 사랑은 특정 대상을 특별하게 여기는 감정이 아니라, 대상이 누구든 간에 그를 실질적으로 이롭게 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묵자가 말하는 사랑은 정신적 사랑이나 마음으로 하는 사랑, 육체적 사랑 등이 아니었음이다.
그래서 묵자는 공동체 구성원은 늘 나보다 나은 이를 본받아야 한다고 규율했다. 남을 이롭게 하고 싶어도 자신에게 그럴 만한 역량이 없다면 실제로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누구나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비로소 차등 없는 사랑이 상대를 이롭게 하는 일이 될 수 있다. 하여 “힘 있는 자는 열심히 다른 이를 돕고, 재물이 있는 자는 힘써 다른 이에게 나누어주며, 도를 깨우친 사람은 부지런히 다른 이를 가르쳐야” 했다. 그렇게 남에게 실제적 도움이 되는 힘, 돈, 앎을 모두가 지녀야 한다고 주문했다.
사실 부모·자식과 다른 이들을 차등 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현실성 낮은 주장이다. 그럼에도 묵자가 그러한 사랑을 표방한 것은 감정을 기반으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실질적 이로움을 기반으로 하는 사랑이라면 오히려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겠냐는 판단 때문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이로움을 좋아하는 본성을 타고나는지라 이에 근거하여 서로를 이롭게 해주는 사랑을 한다면 혈연에 기초한 사랑을 너끈히 넘어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묵자의 겸애는 맹자의 측은해 하는 마음보다 한층 실현 가능성이 큰 사랑이다. 맹자는 아이가 우물에 빠질 것 같으면 무조건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인다면서 이러한 측은지심을 확장해가면 피붙이가 아닌 이들도 사랑하는 어짊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일종의 아가페와 같은 조건 없는 사랑이다. 다만 이러한 사랑을 일상적으로 실현하려면 도덕적 수양이 필요하다.
반면에 묵자의 겸애는 조건이 딸린 사랑이다. 차등 없는 사랑이었지 조건 없는 사랑은 아니었다. 묵자가 내건 조건은 서로를 이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로움을 추구함은 인간의 보편적 본성인지라 이는 별도의 수양 없이도 충분히 실천할 수 있다. 또한 피붙이가 아니라고 하여 사랑을 안 할 이유도 없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데 굳이 혈연을 따질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일상의 평화는 이러한 서로를 이롭게 함과 차등을 두지 않고 사랑함을 자양분 삼아 구현된다. 하여 서로를 이롭게 하는 차등 없는 사랑은 무너진 평화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터전이 된다. 우리가 재난에 처한 이들을 돕는 것이 그저 동정의 발로만이 아닌 까닭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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