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식카페 - (23) 튀르키예 지진과 인간의 사랑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
“내게도 재앙·환란 닥칠수 있다”
공동체 안에 다져진 연대의 힘
사랑·관심만이 인간 생존의 길
튀르키예 향한 헌신적인 원조
인류 구원을 위한 ‘희망의 빛’

플라톤은 ‘향연’에서 남녀가 사랑하며 아이를 낳는 것은 영생을 누리는 길이라고 한다. 사람은 자기 몸으로 그대로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이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눠 나의 일부와 그의 일부가 섞여 자식이 태어나면, 그는 내 존재의 연속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으면 내 존재는 그렇게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좀 더 넓게 본다면, 인간의 종 차원에서 사랑은 인간을 영원히 존재케 하는 유일한 힘이다. 만약 이 세상에 사랑이 식고 사라져, 미움과 다툼, 경쟁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 내 옆의 친구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는 ‘오징어 게임’의 세계라면 인류는 이 땅 위에 계속 생존할 수 있을까? 분쟁의 극단에서 핵무기를 서로에게 마구 퍼붓는다면, 인류는 순식간에 멸종할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인간 종족을 이어가게 하고, 인간 사이에 연대를 만들어 생존을 다지는 가장 큰 힘이 된다. 물론 인간이 아무리 서로 사랑하며 아껴주고 돕는다 해도 빙하기의 찬바람에 공룡이 멸종했듯, 인간도 이 땅에서 사라질 수 있다. 지금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지진으로 수만 명이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을 보면, 인간의 노력은 무기력하고 부질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재앙과 환란 속에서도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관심은 인간이 생존을 지속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타인의 불행에 연민하고, 내게도 그런 일이 닥칠 수 있다는 공포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 사랑은 절실하게 싹튼다. 공동체 안에 사랑으로 다져진 연대의 힘은 인간의 생존을 지킨다. 그래서 재난에 고통받는 튀르키예와 시리아 사람들을 향한 전 세계인들의 관심과 헌신적인 원조는 인류의 생존과 구원을 위한 희망의 빛이다.
“그런데 내가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인가요?” 그가 예수에게 다시 물었다. 이 질문에 답하면서 예수는 그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었다. 한 행인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벌거벗겨진 채로 두들겨 맞고 모든 것을 빼앗겼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버려져 있는 그의 곁으로 한 명의 제사장과 한 명의 레위인이 지나갔다.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종교적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외면했다. 그를 돌보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계산했을 테고, 아무것도 없다는 답을 냈을 것이다. 만약 쓰러진 그가 권력자나 부자로서 유명한 사람이었다면, 그들은 그를 돌보았을 것이다. 수고보다 더 큰 대가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를 돌보았다.
프랑스의 이민자 문제를 철학적으로 깊이 다룬 데리다는 ‘환대에 대하여’에서 ‘친함이 없는 우애’ ‘공동체 없는 공동체’를 주장했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 조건이나 대가를 따지지 않는 ‘무조건적인 환대’의 중요성을 내놓았다. 누군가 고통을 당하여 아파한다면, 그가 특별히 친한 사이가 아니더라도, 그가 나의 공동체 울타리 밖에 있는 타인이라 하더라도, 그가 내 문턱을 넘어 들어와 도움을 요청할 때 무조건적으로 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나의 문턱을 넘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가 함께, 대대로 영원히 사는 구원의 길이지 않을까?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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