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립습니다 - 박순호(1924∼2012)

얼마나 고독하셨을까. 열심히 걸어오신 삶이 후회스러우면서 문득 억울하다고 생각하진 않으셨을까. 11년 전 봄날 철쭉꽃이 만발할 때 한 줌의 재가 되어 홀연히 하늘나라로 먼 여행을 떠나셨던 장모님의 기일이 다가와 그리운 추억을 소환합니다. 먼 여행을 떠나기 며칠 앞두고 장모님께서는 범접할 수 없는 도량을 닦은 고승처럼 이승을 하직할 것이라고 예언하신 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꿈꾸듯 온화한 표정으로 영면에 드셨습니다. 보릿고개 넘으며 살아온 그 시대 여느 어머니처럼 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도 없었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없었기에 희로애락의 힘든 삶을 살아오신 분이셨습니다.

시골에서 조그만 방앗간을 지키며 힘들고 고달픈 시간이었을 텐데도 억척같은 삶을 사시면서 절대로 남 탓하거나 나무라지 않으셨고 얼굴은 언제나 천진불처럼 해맑은 미소가 한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고되게 살아낸 세월이 묻어 있었습니다. 장모님은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하여간 있는 고생 없는 고생했던 그 세월이 어찌 힘겹지 않았을까. 그렇게 고달픈 생활 속에 밥은 먹고 살았지만, 자식들을 잘 가르치지 못한 것은 끝끝내 한이 되지”하시면서 세상을 살면서 고생한 일이야 필설로 다 못한다면서도, 항상 내가 조금만 손해 본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살려고 좋은 생각과 마음을 먹는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자손들에게 늘 “선하게 살아야 한다.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며 선한 사람이 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장모님은 소탈하고 인정이 넘쳤습니다. 바쁜 방앗간 일을 하시면서도 시골 5일 장터에 나온 장돌뱅이 노점상들에게 공짜로 국수를 푸지게 삶아 허기진 배를 채워 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밥 구걸하는 걸인에게도 당신 가족이 사용하는 식기에 고봉밥을 담아 대청마루에서 편안한 분위기에서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자상함과 대범한 여장부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셨습니다. 힘이 부치시는 어느 날엔 막걸리 한 잔에 시금치나물을 잡수시고 옛노래를 구성지게 부르시며 애환을 달래는 멋쟁이셨습니다. 한평생 가장 힘들었던 때는 ‘방앗간 기계가 고장 나면 기술자를 모시러 포장도 안 된 신작로 50리길을 걸어 다니던 시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장모님이 결정적으로 건강이 안 좋아지신 것은 철봉에 매달린 이웃 할머니가 힘이 빠지셨는데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자 본인이 힘이 부쳐 다칠 수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받아 주시다가 엉치뼈를 다치시면서부터였습니다. 그건 남의 아픔을 지나치지 못하는 장모님의 성격 때문이었을 겁니다. 병원 투병생활에 몸이 힘드신데도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으로 병실의 환자들과 두루 친하게 지내시며 늘 재미있는 유머로 웃음을 선사하시고 문병 온 자손들이 준비해온 간식을 골고루 나눠주시던 천상 인간관계의 달인이셨던 장모님이셨습니다.

제가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생각해보면 장모님은 저의 영원한 인생의 스승이셨습니다. 비록 학벌은 낮았으나 학식은 높았으며, 언행에 격식은 차리지 않았으나 사람을 대할 때는 낮은 데로 먼저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자상함. 그 투박함 속에 숨겨진 그 따뜻한 마음을 어느 누가 감히 흉내라도 낼 수 있었으리오. 아주 조그마한 일에도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마음이 흔들리는데 장모님은 어떻게 일관된 삶의 모습을 보여 주실 수 있었습니까. 바보처럼 아둔한 저는 이제야 그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는 백년손님이 아닌 천년손님으로 변함없이 자상하게 배려해주신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장모님과의 시간을 이제는 가질 수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쉽습니다. 장모님께서 하늘나라 먼 여행을 떠나신 그날이 다가오니 무척 보고 싶고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사위 김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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