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지성들의 저작을 번역 출간해온 명가이자 일본 사상가들의 저작과 일본사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를 열심히 쌓은 곳. 일본 대표 인문 출판사인 미스즈서방이다. 책은 미스즈에서 35년간 편집자로 일한 가토 게이지(加藤敬事)의 유고 산문집이다. 책 읽기를 좋아한 소년이 당대 최고의 인문서 편집자가 되기까지의 사적 회고인 책은 20세기 후반 일본 인문 출판의 찬란한 시절을 오롯이 담았다. 편집자가 저자와 함께 사회의 지적 성장을 책임진, 제목 그대로 ‘편집자의 시대’를 증명하는 책이다.
1940년생인 가토는 패전 후 사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출간된 아동 문고와 잡지 등을 탐독하며 독서가의 길에 들어섰다. 대학에서는 철학, 역사학 등 다방면의 수업을 닥치는 대로 청강하며 교양을 쌓았는데, 이때의 경험과 인식이 그가 훗날 편집자를 지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버트런드 러셀의 ‘독일 사회민주주의’ 등 그가 편집한 책의 목록은 ‘지식인으로서의 편집자’인 그의 면모와 함께 20세기 후반 일본 지식인 사회의 열기를 느끼게 한다.
한때 ‘세계 문명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면 일본어를 습득하면 된다’는 말이 있었다. 막대한 양의 번역서가 일본 지식 사회의 버팀목이었던 것이다. 인문서의 ‘벨 에포크’ 시대를 탁월한 편집자인 가토의 삶을 따라 살펴보는 일은 벅차지만 책을 읽을수록 씁쓸한 기분이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미스즈서방 구사옥이 있던 자리는 지금 24시간 코인 주차장이 됐다고 한다. 어쩌면 책은, 국제 출판 교류 현장에서 ‘꿈같은 출판사’로 불렸던 미스즈서방의 ‘꿈의 흔적’의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 296쪽, 1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