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식카페 -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37) 하이브리드의 삶
판결 이끌어내고, 어엿한 공저자로 책 쓰며, 미술품 만들어 내… 심지어 도덕적 설교도
AI는 인간을 감동시키고 적응시킬 것…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 최고의 기준인지 답 못해

과학이 보편적인 진리인 까닭은 그 과학을 주관하는 이성이 보편적인 까닭이다. 철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지배력을 이성의 보편성에서 확인했다. 예를 들면, 근대 사상의 공간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데카르트는 이성의 보편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서 가져온 다음 인용에서 ‘양식(良識)’이란 이성으로 보아도 좋다. “양식(bon sens)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돼 있는 것이다. 누구나 그것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는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상으로 양식을 갖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이현복 역)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이성은 보편성을 띠며, 개인마다 변화무쌍한 사적인 감정 따위와는 다른 것이다.
이런 보편적 이성을 옹호하는 가장 최근 형태는 무엇일까? 대표적으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이성’이 있다. 하버마스는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들’(이진우 역)에서 이 의사소통적 이성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사회문화적 생활형식들은……의사소통적 이성의 구조적 제한을 받는다.” 상호 의사소통을 함으로써 보편적이 되는 이성이 사회와 문화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성이 있고 나서 이 이성이 이차적으로 소통하는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본성 자체가 소통이라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다. “후차적으로 비로소 언어적 옷을 입는 순수이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래부터 의사소통적 행위와의 연관 관계와 생활세계의 구조 속에서 구현되는 이성이다.” 이렇게 이성은 의사소통을 통해 보편성에 도달한다. 의사소통하는 이성의 공동체가 문화와 제도를 규정하고 또 사물과 자연을 관리한다.
그런데 정말 이성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푸코처럼 보편적 이성의 존재 자체를 의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대담에서 푸코는 말한다. “제가 보기에는 막스 베버 이래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건 깡길렘과 같은 과학사가들이건 문제가 된 것은 지배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유일한 이성의 지위를 부여받은 합리성의 형식을 분리해냄으로써 그것이 단지 여러 형식 중 가능한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정일준 역) 하나의 보편적 이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이라 여겨졌던 이성은 이런저런 역사와 맥락에 따라 출현하는 ‘한 경우의 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의사소통적 이성 역시 보편적인 것이 아니리라. 우리의 소통 자체가 인간 이성의 품을 떠난 시대에 들어서 버렸다는 것이 이를 잘 알려준다. 인간의 이성은 또 다른 인간 이성이 아니라 기계와 소통하기 시작했다. 바로 챗GPT(Chat Generated Pre-trained Transformer), 대화 전문 AI 챗봇과의 소통 말이다. 이제는 이성과 이성이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기계가, 이성과 비인간이 소통한다. 그래서 이성과 기계의 합작품, 바로 ‘하이브리드’가 탄생한다. 하이브리드는 어떤 미래를 가져올까? 이것이 우리 시대가 궁금해하는 질문이다.
근대는 인간 이성이 그가 가진 수학과 수학에 뿌리를 둔 기계기술을 통해 대상을 지배한 시대였다. 지배하는 능동적인 인간 이성과 지배당하는 자연의 이분법이 근대의 바탕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런 지배하는 인간 이성과 지배당하는 자연이라는 구도는 허구적일 것이다. 저 이분법의 근대가 허구였다는 뜻에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홍철기 역)라는 제목의 책을 쓴 과학철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대상들을 만든 만큼 대상들이 인간을 만들기도 한 것이다.” 인간 주체와 대상은 뚜렷이 구별되며, 그 구별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그가 만든 기계 사이의 구별로 표현돼 왔다. 진실일까? 아니라면,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은 기계를 만들었고 스스로를 기계의 일부가 되도록 하였고……기계를 가지고 자기 자신의 신체를 건설하였다.”
한마디로 인간 이성과 그가 지배하고 가공하는 대상은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제 드러났다. 이 점을 기술철학자 질베르 시몽동은 일찍이 통찰한 바 있다. 시몽동은 1958년에 쓴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김재희 역)에서 이렇게 말한다. “문화와 기술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기계 사이에 세워진 대립은 거짓이며 근거가 없다.” 인간과 그가 지배하는 대상 사이를 나누는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기술적 대상 안에 인간적인 것이 존재한다.” 이런 시몽동의 생각에 호응하는 문장을 우리는 앞서 언급했던 라투르의 저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은 기계가 아니지만 기계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기계가 결코 기계적이지 않다는 것을 안다.” 즉 기계 안에는 인간적인 것이 섞여들어 있다. 무엇이 그 예가 될까? 바로 챗GPT 아닌가?
하버마스가 생각한 바와 달리 이성은 다른 이성과의 소통을 통해 보편성에 근접하지도 않으며, 소통을 통해 이성을 지닌 자들의 공동체를 이루지도 않는다. 이성들 사이에서만 이뤄지는 소통은 사라졌다. 챗GPT의 존재가 증언하듯 이제 이성의 소통 상대자는 비이성이자 비인간인 기계다. 판사는 챗GPT와 상의해 판결을 이끌어내고, 학자는 챗GPT와 대화해 어엿한 공저자로서 책을 쓰며, 정치가는 챗GPT와 함께 연설문을 만든다. 공론 장안으로 인간 이성이 아닌 기계가 들어선 것이다.

챗GPT는 인간이 던지는 질문에 창의적인 답을 내놓는다. 그의 답은 자신을 창조한 개발자, 즉 인간 주체의 이성과 의도와 통제를 벗어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기계는 ‘자율적’이다. 요컨대 기계이자 대상이면서 동시에, ‘자기의식이 없는데도 주체’인 것이다. 주체와 대상의 구별이 철폐되고 도구와 주체가 서로 구별되지 않는 하이브리드, 라투르가 붙인 별칭대로 ‘키메라’가 출현한 것이다. 일찍이 들뢰즈는 하이브리드의 탄생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인간의 힘이 다른 힘, 예컨대 정보의 힘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힘은 인간과 함께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즉 분할불가능한 ‘인간-기계(homme machine)’ 체계를 구성하며, 제3세대 기계와 이미 관계 맺기 시작했다는 것은 오늘날 상식이 아닌가? 이는 탄소 대신 실리콘과의 결합인가?”(권영숙 외 역) ‘인간-기계’ 또는 ‘주체-기계’인 키메라는 인간의 가장 좋은 조언자가 될 수도 있고,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자기의식을 지닌 인간 주체가 인공물과 자연을 지배하는 시대, 바로 근대와 결별한 것일까?
이미 근대를 지나쳤는데, 우리는 여전히 근대적 인간 주체의 근심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챗GPT는 이미 지식을 산출하고 유통하는 주체인데, 한낱 학생들이 부정 과제물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수단으로 보아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오래전 전자오락이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을 때 도덕적 설교자의 어조로 폭력이 난무한다며 이 기계의 폐해를 우려하던 목소리가 기시감 속에서 귀에 들린다. 인간 주체는 새로운 기계만 나오면, 주체와 대상을 가르는 이분법과 주체로서 자신의 지위를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터미네이터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챗GPT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라 윤리 규정을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누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일 수 있을까? 오히려 정의의 이름으로 챗GPT의 언론자유를 편드는 사람은 왜 나오지 않겠는가? 우리는 인간 주체와 그의 지배 대상의 구분, 원본과 복사물의 구분 등등과는 멀어진 새로운 지식 환경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좀 이상한 비교일지 모르지만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재래의 가족은 풍비박산 났다. 어른, 아이, 아버지, 어머니, 자식 역할도 이제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AI와 인간의 관계도 그럴 것이다. 인간계는 풍비박산이 났다. AI는 문학 작품이든 미술품이든 만들어낸다. 이는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 홀릴 수 있다는 것,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핵심은 작품의 수준이 높냐 아니냐, 독창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유혹이 예술의 영역에 그칠까? 일단 유혹의 기술을 배우면 그 적용 범위는 한없이 넓어진다. AI가 유혹의 문제라는 것은, AI가 칵테일이나 요리 레시피에 대해서까지 독자적인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최고의 레시피를 제공할 수 있느냐 아니냐가 관건이 아니다. 도대체 무엇이 최고의 기준인지 우리는 결코 답하지 못한다. 관건은 AI는 무엇인가를 제시하며 인간을 유혹할 것이고 결국 적응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AI가 인간이란, 예술적 갈구 이상으로 종교적 갈구가 심한 취약성을 가진 생물이라는 것을 안다면? AI는 신을 발명해서 인간을 감동시킬(유혹할) 것이다. AI 앞에서 단지 예술가가 살아남을까가 걱정이 아니라 재래의 종교가 살아남을까가 걱정이 될 것이다. 그러면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직업이 위협받게 되며, 이제 우리는 이런 정겹고도 짜증 나는 질문자가 없는 외로운 거리를 걸어가야 할 것이다. 죽어가는 내게 기도를 해달라고 하면, 챗GPT가 신부님, 목사님, 스님보다 더 영혼의 위로가 될 말을 해줄 것 같다. 그러면 이미 그는 하나의 기능이 아니라 동반자다. 내가 아는 한 종교는 말씀의 종교이다. 그리고 챗GPT만큼 말 잘하는 자도 없다.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곧 나으리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본문에서 언급된 현대 과학철학과 기술철학의 주요 인물 소개이다.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1924∼1989) = 개체화의 문제, 기술적 대상의 존재론적 위상의 문제, 인간과 기계의 관계 등을 숙고한 철학자로서 현대사상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2022) = 과학기술학, 생태주의에 입각한 정치철학적 사유를 보여준 철학자다. 하자가 있는 제품을 회사에서 리콜하듯, 근대에 대해 ‘회수조치’하는 것 역시 그의 주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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