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에는 다양한 톤의 "연진아"가 등장한다. 등장인물 누구나 연진이를 부른다. 하지만 귓전을 지나 뇌리에 깊이 각인되는 "연진아"는 단연 문동은(송혜교 분)의 몫이다. 그 복잡다단한 심경을 담아 부르는 "연진아"라는 호칭이 주는 뉘앙스는 송혜교의 미묘한 톤을 통해 온전히 전달된다.
‘더 글로리’는 온통 문동은으로 통한다. 그를 둘러싼 가해자들은 물론이고, 그를 돕는 주여정과 강현남도, 연진의 남편인 하도영과 그 딸, 변태 남교사와 혜정의 예비 장모, 동인의 가장 첫 가해자인 엄마 역시 문동은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각 인물들과 만날 때마다 문동은의 태도와 말투는 달라진다. 그는 학폭의 피해자이자 가정폭력의 피해자, 건실한 교사이자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바둑을 두는 인물이다. 그리고 주여정에게는 보호하고자 하는 한 여성이다.
이런 관계성은 송혜교가 보여주는 디테일 안에서 완성된다.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은 참으로 정적이다. 큰 동작을 보이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는다. 감정 표현도 절제돼 있다. 좀처럼 웃지도 않는다. 오랜 아픔을 통해 웃음을 거세당한 인물이나 진배없다. 강현남의 엉뚱한 행동을 보며 차 안에서 고개를 돌며 웃음을 참는 모습은 우스우면서도 슬프다. 가벼운 미소 한번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 그의 삶에서 웃음마저 사치로 느끼기 때문이리라.
송혜교는 그 어려운 연기를 능히 해낸다. 김 작가가 행간에 심어놓은 말의 뉘앙스를 정확히 짚으며, 작은 표정의 변화와 미묘한 톤의 차이를 통해 억눌린 분노를 아주 조금씩 분출하고 해소해가려는 문동은을 섬세하게 매만진다.
또한 문동은은 각 인물들과 얽히고설키며 역할 관계를 분명히 드러낸다. 촘촘히 모은 증거와 치밀하게 짜놓은 설계를 토대로 가해자들의 목을 옥죄는 과정 속 문동은은 지극히 차갑고 이성적이다. 주여정, 하도영과 함께 할 때는 또 다르다. 주여정을 애써 밀어내면서도 조금씩 마음의 빗장을 열어가는 모습은 시나브로 시청자들의 마음마저 동요하게 만든다. 하도영과는 아내 박연진이 "그게 바람이야"라고 쏘아붙일 정도로 어떠한 육체적 접촉 하나 없이 실타래 같은 감정선을 주고 받는다.
송혜교가 빚은 문동은은 가슴 아린 여운을 남겼다. "오늘부터 내 꿈은 너야 우리 꼭 또 보자"라고 말하던 문동은의 꿈인 박연진은 철창에 갇혔다. "피해자들의 연대와 가해자들의 연대는 어느 쪽이 더 견고할까?" 묻는 문동은은 피해자들의 연대가 강함을 증명했고, "여기까지 오는 데 우연은 단 한 줄도 없었"다는 문동은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짊어진 퍼즐을 풀었다.
그리고 문동은은 말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좋아해도 되는 그런 순간들이 삶인 거면, 내가 살아있던 날들은 과연 며칠이나 될까? 연진아." 적어도 지금까지의 문동은에게 그런 날을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며칠이 몇 주가 되고, 또 몇 년이 될 것이다. 그렇게 송혜교가 생명력을 불어넣은 문동은은 ‘더 글로리’의 뒷편 어디선가 삶다운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란 믿음을 심어줬다.
분명 김 작가는 역대 그의 작품 중 가장 날카롭고 까다로운 필력이 서린 공을 있는 힘껏 던졌다. 그 공은 작가가 원하는 미트 안 어딘가에 정확히 꽂혔다. 그리고 송혜교는 그 변화무쌍한 공을 무리없이 잡아낸 든든한 포수다.
안진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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