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킬러 집단인 엠케이의 대표 차민규(사진 왼쪽)와 가장 뛰어난 살인 기술을 지닌 길복순(오른쪽)은 직장 동료 이상의 미묘한 감정을 주고받지만, 길복순의 퇴사를 두고 대립한다.
전문 킬러 집단인 엠케이의 대표 차민규(사진 왼쪽)와 가장 뛰어난 살인 기술을 지닌 길복순(오른쪽)은 직장 동료 이상의 미묘한 감정을 주고받지만, 길복순의 퇴사를 두고 대립한다.


■ 안진용기자의 그여자 그남자 - 31일 공개 영화 ‘길복순’의 복순과 민규

업계에선 신망 높은 일타 킬러
집에선 ‘중2 딸’ 눈치보기 급급
딸과 함께하려 퇴사 꿈꾸지만
직장 상사 민규 반대에 부딪혀

킬러 세계 통합한 냉혹한 남자
복순에게는 개인적 감정 얽혀
자신의 규칙 복순이 어기면서
신념과 감정 사이 선택 내몰려


그 여자는 워킹맘이다. 직장에선 인정받는 재원이다. 항상 그렇듯, 성공한 워킹맘은 실패한 맘이 되기 쉽다. 회사의 기대치가 높은 만큼 할애해야 할 시간이 많은 탓이다. 그만큼 가정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여자, 싱글맘이다. 한국에서 아빠 없이 아이 키우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 여자, 길복순(전도연 분)은 퇴사를 꿈꾼다.

그 남자는 워킹맘이자 싱글맘인 길복순의 직장 상사이자 이 회사의 대표다. 게다가 길복순은 업계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 회사의 창립 멤버다. 그러니 여전히 에이스인 길복순을 향한 신임도 두텁다. 가끔은 단순한 직장 상사 그 이상의 눈길을 보낸다. 그렇다 보니 주변에서는 질투와 질타가 난무한다. “왜 길복순만 감싸냐?”고 나무란다. 그 남자, 차민규(설경구 분)는 그 누구보다 길복순의 상황을 이해하고 배려하기에 그의 퇴사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는 31일 공개되는 넷플릭스 ‘길복순’(감독 변성현)의 주인공을 맡은 두 남녀, 직업이 독특하다. 국내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살인청부기업 엠케이 소속이다. 킬러도 누군가의 가족이고, 그들이 속한 조직도 엄연한 회사다.

엄마와 킬러라는 모순된 삶을 사는 길복순.
엄마와 킬러라는 모순된 삶을 사는 길복순.


◇그 여자, 퇴사를 꿈꾸다

길복순은 업계의 ‘일타’ 킬러다. 항상 가장 어려운 임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그 여자는 목숨을 건 이 업무를 즐긴다. 일본의 명인이 만들었다는 장검을 쥔 사무라이에 맞서 마트에서 산 3만 원짜리 도끼를 들고 대등하게 싸운다. 시간을 체크한 후 서둘러 싸움을 마친 여자는 말한다. “마트 끝날 시간이야.” 그 여자에게 살을 파고드는 칼보다 무서운 건, ‘중2병’을 단단히 앓고 있는 15세 딸의 끼니를 챙길 찬거리를 사지 못하는 것이다.

딸이 커가며 길복순의 걱정 또한 커진다. 눈치 빠른 딸이 엄마의 직업을 눈치챌까 무섭다. 그래서 후배에게 토로한다. “죽어가는 사람 눈동자에 내가 비칠 때가 있거든. 그런 날은 집에 가서 애랑 눈 맞추기도 겁이 나.” 마냥 애 같던 딸이 학교에서 또래 남자아이를 가위로 찔렀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연필 하나로 사람을 무참히 살해하는 길복순이지만, 이 소식에는 기겁한다. 딸이 자신을 닮을까 겁나고, 그런 딸을 훈육할 자격을 가진 엄마인지 고민한다. 그래서 그 여자는 ‘엄마’가 되기 위해 ‘킬러’를 포기하려 진지하게 고민한다. 때마침 재계약 시점이다. 회사에 부담을 주지 않고, 질서 있게 퇴진할 기회인 셈이다.

사실, 그 여자의 회사 내 입지 역시 예전 같지 않다. 결정권자인 차민규의 신임은 여전하지만,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그의 동생 차민희와 번번이 부딪힌다. 게다가 후배들은 오랜 기간 기득권을 쥐고 있는 길복순을 마뜩잖게 바라본다. 노쇠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순간순간이 죄다 짜증 난다.

한때는 일이 먼저였다. “애 때문에 일을 포기하기는 싫다”고 말하며 열심히 본분을 다했다. 그의 명성은 높아졌다. 당연히 더 많은 의뢰가 들어왔다. 그에 따라 딸과 함께하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사춘기에 접어든 딸의 자아가 커졌다. 집 밖에서는 죽어가는 사람의 눈동자를 보며 연민조차 느끼지 않지만, 집 안에서는 딸의 눈치를 본다. 그래서 토로한다. “사람 죽이는 건 심플해, 애 키우는 거에 비하면.”

세상은 모순이다. 일을 게을리하면 욕먹지만, 일을 열심히 해도 욕먹는다. 시기, 질투가 난무한다. 집 밖에서는 칭송받고 큰소리 떵떵 치는 직장 상사이자 선배여도, 집 안에서는 자식들과 말 한마디 못 섞어 안달하는 엄마다. 사실, 누군가를 죽이는 킬러가 누군가를 기른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그래서 길복순은 오늘도 이렇게 내뱉는다.

“참 모순이야. 이런 일을 하는 엄마라니….”

◇그 남자, 퇴사를 말리다

차민규는 길복순의 멘토다. 그에게 살인 기술을 전수했다. 복사기처럼 자신을 따라 하며 업계 1인자로 거듭난 길복순이 참 기특하다. 어려운 미션은 항상 길복순에게 맡겼고, 그는 한 톨의 실수 없이 이를 수행했다. 그런 길복순이 재계약을 하지 않겠단다. 비상이다. 엠케이의 간판이 떠나려 한다. 일이 싫어서가 아니다. 딸을 키우기 위해서다. 차민규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다.

차민규는 철두철미하다. 질서없던 킬러들의 세계를 통합해 회의체를 마련하며 3가지 규칙을 정했다. 첫째, 미성년자는 죽이지 않을 것. 둘째, 회사가 허가한 작품만 할 것. 셋째, 회사가 허가한 작품은 반드시 트라이할 것. 하지만 이는 가이드라인일 뿐, 결국 차민규가 법이다. 킬러들이 이 규칙을 지키는 이유는 이를 만든 차민규가 두렵기 때문이다.

이렇듯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차민규가 유독 길복순 앞에서는 작아진다. 길복순을 감싸고 도는 모습은 다른 이들의 반발을 샀다. 하지만 차민규는 요지부동이다. 그의 마음은 회사의 간판 킬러를 지키겠다는 오너의 마음, 그리고 길복순을 개인적으로 아끼는 남자의 마음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차민규는 냉혹한 킬러다. 그래서 길복순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도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딸 문제로 회사 일에 지장이 없도록 하겠다’는 길복순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이제 길복순에게는 차민규와의 신의보다도 딸을 향한 모성애가 앞선다. 그래서 재계약 만료를 앞두고 두 사람은 대립각을 세운다.

그러다가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하는 일이 벌어진다. 자신이 세운 킬러 세계의 3가지 규칙에 위배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규칙을 어긴 자는 길복순이다. 이제 차민규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남았다. 스스로 규칙을 허물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길복순을 내칠 것인가.

‘길복순’은 ‘불한당’·‘킹메이커’로 유명한 변성현 감독의 신작이다. 킬러도 누군가의 가족이며, 엄마일 수 있다는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앞서 방송된 드라마 ‘일타스캔들’에서 공부 잘하는 고교생 딸을 키우기 위해 반찬가게를 운영하는 열혈 엄마로 분했던 배우 전도연이 이번에는 반항기 넘치는 중학생 딸의 엄마로 나선다.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일’에 이어 3번째 호흡을 맞춘 전도연, 설경구의 고난도 액션 연기와 빈틈없는 연기 호흡이 압권이다. 137분. 청소년 관람불가.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안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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