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호 연세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연세-EU 쟝모네센터 소장

다수에만 매달리는 포퓰리즘
열성팬과 결합 땐 위험 극대화
소수 견해가 증폭돼 과대 반영

정치인은 비합리 행태도 불사
지지자 이끌 ‘위대한 배신’ 실종
의회 위기 본질은 생계형 정치


민주주의 제도가 오작동하면 두 가지 부작용이 나타난다. 후견주의나 대중영합주의, 즉 포퓰리즘이 발생한다. 후견주의란 정치엘리트와 이들의 후견 세력이 결탁해 배타적 이익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의회나 정당은 공익을 대변하기보다는 정치인 자신이나 후견 세력의 이익을 대변한다.

엘리트의 이러한 권력 독점 현상을 목격한 다수의 중산층과 서민 그리고 노동자들은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시도하고 자신들이 지지할 정치인을 물색한다. 이러한 참여형 모델은 비기득권층의 이익 표출을 활성화한다는 점에서 나름 합리성을 갖지만, 과도할 경우 정치적 문제를 유발할 수 있는데, 그 한 예가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은 비주류 정치집단과 중산 및 서민 계층이 연합해 다수의 힘과 민족주의 정서를 기반 삼아 정권을 획득하려는 정치 전략인데, 다수의 의견이 정책 수립 과정과 결과를 무조건 지배할 가능성이 크다는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의 장점은 소수의 의견까지도 수용해 공익을 정의하는 제도인데도 말이다. 직접민주주의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정치 선진국들이 의회를 통한 대의민주주의를 운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포퓰리즘보다 더 위험할 수 있는 정치 현상이 유행하고 있으니, 이른바 ‘팬덤정치’다. 최근 연구 결과를 보건대, 이 현상은 후견주의의 그릇된 파생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정치 이념과 상관없이 특정 대상을 추종하는 열성 팬(fan) 세력이 전략적 정치 참여를 시도하는 현상이다. 이들은 기득권 엘리트 집단도 아니고 수적으로도 소수지만 자신들의 집약적 운동력을 정치적 영향력으로 전환한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미처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이른바 ‘합리적 무지’의 영역을 장악해 자신들만의 배타적 이익을 관철하려 한다.

팬덤정치는 전통적인 민주주의 모델에 반하는 몇 가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첫째, 자신이 열광하고 지지하는 대상에 따라 정치적 견해를 바꾼다. 민주주의는 이념적 색깔을 대표하는 정당들이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의회에서 심의함으로써 정책을 도출한다. 그런데 팬덤정치는 정치 이념과 상관없이 상업·문화·지연 등을 매개로 감성적 정치 참여를 시도함으로써 정치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린다. 이런 상황에서 정당과 의회는 제대로 기능하기 어렵다.

둘째, 정치적 소수의 견해인데도 팬덤을 통해 강력한 결집력을 갖는 경우 다수의 견해 이상으로 증폭돼 정책 결정 과정에 초과 반영될 가능성이 커진다. 셋째, 팬덤정치에 편승하는 정치인은 강력한 소수 지지 세력의 뒷배에 힘입어 비합리적인 정치적 행위를 구사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된다.

‘문빠’ ‘개딸’ 등의 그룹에 대해 우려를 갖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소수지만, 강력한 팬덤 세력과 결탁한 정치인들은 자신이 추구하던 신념을 수호하기보다는 후견제와 마찬가지로 오히려 이들과 영합하고 이들을 이용하는 행태를 보일 가능성이 커진다. 여론보다는 열성 지지자만을 의식하고 심지어 그들의 꼭두각시를 자처한다. 결국 자신을 평가하는 것도, 그리고 보호하는 것도 그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인과 정당은 지지자들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의무가 있지만, 동시에 그들을 설득해야 하는 책임도 있다. 막스 베버가 지적했듯이 권력을 추구하는 행위가 국가와 사회에 대한 대의적 헌신이 아니라 객관성 없는 자기도취나 추종자들의 저열한 동기에 포획될 때 직업으로서 신성한 정치에 대한 ‘배신’은 시작된다.

특히, 진보 정치인에게 팬덤은 치명적인 유혹이다. 그들 팬덤이 제공하는 보호와 지지는 달콤하다. 그러니 그들 앞에서 ‘책임은 나에게 있다’라고 당당하게 고백하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진보적 정치인의 무기는 열정과 과학성이다. 그래야 보수에 대항할 수 있다. 위대한 정치가와 정당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설득하고 개혁에 동참시킨다. 이것은 신념 있는 정치인만이 감행할 수 있는 ‘위대한 배신’이다. 유권자를 선도하려는 정치인은 사라지고 그들의 명령만 따르겠다는 생계형 정치인은 늘어간다. 대한민국 의회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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