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수의 Deep Read - 저성장 진입한 한국
한국, 버블·금리·인구변화 등 1990년대 일본과 유사… 빚이 경제 위기 만드는 ‘민스키 모멘트’ 우려
한국 경제 최대 문제는 생산성 정체… 혁신·기술진보 환경 조성으로 경제 구조적 단절 없애야
◇민스키 모멘트
현재 한국 경제는 빚, 자산가격, 통화정책 경로, 인구학적 변화의 측면에서 장기 침체로 진입한 시점으로 평가되는 1990년 당시 일본과 유사한 경제 여건을 공유하고 있다. 인플레이션과 원화가치 하락 압력을 받는 한국이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한국 경제 이상 없다’는 아니다. 우리 경제는 구조적 취약성이 노출된 위험지역에 들어왔으며 이 위험은 경기순환 과정에서의 경기 하방 위험과 성격이 다르다. 따라서 경기 안정화를 위한 통상적인 정책수단으로는 치유될 수 없다.
<그림1>은 양국 중앙은행 정책금리를 시간대를 조정해 월별로 보여준다. 정책금리 인상 시점(한국 2021년 8월, 일본 1989년 5월)을 맞추고 일본 경제에 버블이 시작된 시기로 평가되는 1983년 1월(한국은 2015년 4월)을 기점으로 했다. 당시 일본중앙은행(BOJ)의 핵심 정책금리는 ‘공정할인율(ODR)’이다. BOJ는 1986년부터 금리를 내리기 시작했는데, 그 배경은 엔화 가치가 급격히 상승해 수출 부진에 따른 디플레이션 갭이 일어난 것과 관련 있다.
엔화 가치 상승은 달러화 안정을 위한 1985년 ‘플라자 합의’의 결과물이다. 이때 거품경제가 본격화했다. BOJ는 1989년 5월부터 1990년 8월까지 16개월간 정책금리를 3.5%포인트 인상했다. 공격적인 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4% 내외 상승률을 보이던 일본의 경제 성장이 하락세로 돌아선 것은 3년 후인 1992년이었고, 지역 금융기관의 부실이 드러난 건 1994년 들어서였다.
그런데 왜 한국은 일본과 달리 한은의 금리 인상 러시가 금융과 실물부문을 이토록 빠르게 위축하는 파급효과를 초래할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빚이 과다할 때 경제가 안정 상태를 벗어나 불안정 상태로 가는 이른바 ‘민스키 모멘트’를 모형으로 구현한 Fed 이코노미스트의 이론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빚과 경제
현재 한국, 미국, 유럽 등지에서 일어나는 금융 불안은 각기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민스키 모멘트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오랜 저금리 기간 끝에 물가 안정을 위해 내놓은 긴축 통화정책이 물가를 잡기 전 먼저 금융 불안을 야기한 것이다.
두 나라의 빚은 모두 높은 수준이나 그 구성에 차이가 있다. 정부부문은 1990년 기준 한국(GDP 대비 45%)이 일본(63%)보다 작다. 민간부문은 한국(비금융기업 117%, 가계 106%)이 일본(비금융기업 138%, 가계 68%)보다 크다. 이 차이는 과다한 가계 빚에 연유한다. 빚이 지나치면 가계와 기업이 상환 압력에 시달려 소비와 투자가 줄어들어 오히려 경제가 위축되는 부채 ‘오버행’이 일어난다(문화일보 2022년 2월 8일자 ‘김경수의 Deep Read’ 참조). 더욱이 거품이 사라질 때 오버행은 더 심화한다.
노무라연구소의 리처드 쿠 박사는 포스트 버블 시대의 경제를 대차대조표 불황으로 묘사했다. 기업의 현금 흐름이 국민경제에 유입되지 못하고 빚을 갚는 데 누출돼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정부 빚이 30여 년 만에 GDP 대비 230%에 이를 정도로 일본의 재정이 악화한 것은 이 악순환을 막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우리 경제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대목이다.
두 나라 모두 빠른 인구학적 변화를 겪고 있으나 현재 한국이 당시 일본보다 열악하다. 노인 인구 부양비율, 즉 생산가능인구 100인당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1990년 일본이 17.8, 2023년 한국이 26.1이다. <그림2>는 시간대에 따른 연간 노인 인구 부양비를 보여주는데 갈수록 격차는 더 벌어진다. 이 격차는 일본과 한국의 인구 감소가 시작된 가운데 한국이 일본보다 고령화 단계는 낮지만 고령화 속도가 더 빠르고 출산율이 더 낮은 데에서 비롯됐다.
◇저성장 진입한 한국
낮은 성장률은 지금 한국(2022년 2.6%)의 형편이 30여 년 전 일본(1990년 4.8%)보다 못한 이유를 제공한다. 우리 경제는 이미 저성장에 진입했다. 김세직 서울대 교수는 이를 경제성장 ‘5년 1% 하락의 법칙’이라고 조어했다. 낮은 성장률은 생산성 정체에서 비롯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총요소생산성의 경우 한국의 5년 이동평균 증가율은 2021년 기준 1.75%였는데 일본은 1990년에 2.49%여서 상당한 격차가 있다.
높은 무역의존도는 한국(2022년 GDP 대비 수입·수출 96.8%)이 일본(1990년 19.3%)보다 유리하다. 수출에서 성장의 출구를 찾을 수 있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다. 국제경제학자들은 수출 고도화의 정도가 한 나라 경제성장의 리트머스 시험지와 다름없으며 글로벌 가치 사슬에서 차지하는 그 나라 위상의 핵심을 이룬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연구는 우리나라 성장률 추세가 빠르게 떨어지고 수출이 해외 수요에 민감하게 변동하는 것은 별개의 현상이 아니며, 정체된 생산성에 공통요인이 있다는 함의를 준다. 2019년 미·중 무역전쟁의 당사국 중국의 수출은 흔들리지 않았는데 한국 수출은 2년 연속 역성장했다.
지난 30여 년 일본의 경험에서 얻을 교훈은 한국 경제에 ‘구조적 단절’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1990년 후 일본은 돌아오지 못했다. 양적 완화, 아베노믹스도 되돌리지 못했다. 잃어버린 10년은 잃어버린 20년으로, 다시 잃어버린 30년이 됐다. 전 세계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과 싸우는 와중에 엔화 가치가 폭락해도 BOJ는 꼼짝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수십 년간 저금리에 길들어진 상황에서 어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금융 정상화
한국 경제가 위험지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금융 정상화에 매진해야 한다. 금융이 제 기능을 작동하지 못할 때 부실이 늘어나고 이를 방치하면 경제는 발목을 잡힌다.
우리 경제 최대 과제는 한 가정에서 식구가 줄어도 어떻게 수입을 보전해 생활 수준을 유지할 것인지의 문제와 다름없으며, 결국 생산성 제고로 요약된다. 나라 경제에서 생산성 제고는 혁신이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고 기업이 기술 진보를 원활히 수용할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
성균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전 한국경제학회장
■ 용어설명
‘민스키 모멘트’는 과도한 부채가 임계점을 지나 자산가치 붕괴와 경제위기를 일으키는 순간. 하이먼 민스키가 ‘금융 불안정성 가설’에 따라 제기한 이론으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주목받음.
‘플라자 합의’는 美 레이건 시대 폭등한 달러화 안정을 위해 1985년 9월 미·일·독·영·프 5개국이 맺은 조치. 일본은 엔화 평가절상으로 버블 붕괴 등 타격을 입었고 이후 잃어버린 30년이 시작.
■세줄요약
민스키 모멘트 : 한국 경제는 빚, 통화정책 경로, 인구학적 변화 등에서 1990년대 일본과 유사한 경제 여건을 공유함. 즉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초입단계와 닮아. 이는 통상적인 정책수단으로 치유될 수 없어.
빚과 경제 : 빚이 지나치게 많으면 소비와 투자가 줄어들어 경제가 위축되는 부채 ‘오버행’이 일어나. 긴축 통화정책이 물가를 잡기 전 먼저 금융 불안이 야기됨. 인구 변화에서도 한국은 30년 전의 일본보다 열악.
저성장 진입한 한국 : 한국 경제는 이미 저성장에 진입. 지난 30년 일본에서 얻은 교훈은 경제에 ‘구조적 단절’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경제혁신·기술진보 환경 조성으로 생산성 정체 문제를 해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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