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식카페 -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25) 칠레 산티아고
풍부한 지하자원 가진 중세유럽풍 칠레 수도… 유토피아 꿈꾸던 급진개혁은 쿠데타로 실패
피노체트 개발독재로 ‘급속도 경제성장’ 뒤엔 잔악한 폭정·극심한 사회 불평등… 정신병 발병률 세계최고 ‘굴욕’

“바다를 통해 고통이 들어왔다.”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를 기록한 서사시 ‘모든 이의 노래’에서 파블로 네루다는 말했다. 이 작품에서 네루다는 유럽인 침략자 자손이 들어온 후 칼을 휘둘러 대지를 난도질하고 대포를 쏘아 숲을 태우는 만행을 정면으로 고발한다. 무엇보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의 기억을 말살하려 했다. “아무도 그것을/ 기억할 수 없다. 바람도/ 그것을 잊었고, 물의 언어는/ 묻혔다. 열쇠는 없어지고/ 침묵과 피에 파묻혔다.”
전염병, 지진, 홍수, 화재 등으로 몰락 위기를 겪으면서도 산티아고는 빠르게 발달했다. 그러나 자신들 전통에 강제 노동이 없었기에 마푸체인은 무려 350년 동안 유럽인 지배에 격렬히 맞섰다. 니카노르 하라는 노래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거짓된 세계는/ 멈춰 버린 바퀴보다 덧없지.” 거짓은 언제나 진실보다 수명이 짧다.
1810년 칠레는 베르나르도 오이긴스를 지도자로 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1818년 스페인에 결정적 승리를 거두어 독립했다. 중세 유럽풍의 아름다운 도시 산티아고는 칠레공화국 수도가 되었다. 도시는 성장을 거듭했다. 1820년 4만6000명이었던 인구는 1888년엔 25만6000명으로 6배 가까이 불었다.
1879년부터 약 4년간 볼리비아, 페루 등 주변 국가와 초석전쟁을 벌인 끝에 차지한 초석, 구리 등 풍부한 지하자원은 칠레를 남아메리카 제일의 경제 대국으로 만들었다. 태평양 무역의 지배자로 성장한 칠레는 거대한 부를 일구고 자본주의 경제를 꽃피웠다. 산티아고는 그 혜택을 마음껏 누렸다. 수많은 농민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밀려왔고, 산티아고 인구는 해마다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도시 주변으로 빈민가가 형성되고 전염병이 만연하는 등 사회문제가 산티아고를 사로잡았다.
1910년 멕시코혁명 이후 중남미 여러 나라가 쿠데타와 내전에 휩싸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칠레는 자유주의적 공화주의 정치체제의 유지에 성공하면서 민중 혁명의 물결을 체제 내로 흡수했다. 1918년 초석 경제 몰락과 1929년 대공황 탓에 국가 부도 등 대혼란이 벌어졌을 때, 선거를 통해서 인민전선에 정권을 내주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 보수파와 자유파 중심으로 안정적 정국이 지속됐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불평등 탓에 민중들 불만이 서서히 쌓여갔다. 1960년대에 프레이 정부는 쿠바혁명에 자극받은 민중을 달래려고 ‘자유 속 혁명’이란 구호 아래 농지 개혁과 함께 미국 자본이 지배하던 구리 산업 칠레화 등을 선언했다. 그러나 민중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연합이 우파의 분열을 틈타 선거에서 극적으로 승리하면서 유토피아적 열망을 품고 구리, 섬유, 금융 등의 국유화를 단행하는 등 급진 개혁을 시행했다. 칠레 곳곳에서 마푸체 원주민 문화에 바탕을 둔 민중가요가 ‘완전히 다른 칠레’를 찬양하면서 널리 울려 퍼졌다. 시인이자 가수였던 빅토르 하라는 노래했다. “내 기타는 돈 많은 자의 기타도 아니고/ 그것과는 하나도 닮지 않았지.”


1973년 9월 11일,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은 군부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주도 아래 쿠데타를 일으켰다. 라디오 국영 방송은 쿠데타를 알리는 일기예보를 반복해 내보냈다. “오늘 산티아고엔 비가 내린다.” 아옌데는 대통령궁에서 소총을 들고 최후까지 맞서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지들과 함께 축구 경기장으로 내몰린 하라는 “얼마나 더 천천히 더 많은 죽음이 일어날까?/ 그러나 곧 양심의 물결이 나를 건드리고/ 우리들 주먹은 새로 일어서리라.” 노래를 부르면서 헬리콥터 기관총에 맞아 죽음을 맞았다.
쿠데타 이후, 피노체트는 잔악한 폭정으로 국민을 공포의 지옥에 빠뜨렸다. 1990년까지 이어진 철권통치 기간에 시민 약 3000명이 살해되고, 2만8000명이 납치돼 고문당했다. 군부는 출판사를 공격해 네루다 시집을 불사르고, 서점을 습격해 아리엘 도르프만 소설을 불태웠으며, 민중가요에 쓰이는 안데스 원주민 악기 사용을 금지했다. 자유를 억누르고 사상을 통제하며 기억을 왜곡해 쿠데타를 합리화하고, 아옌데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조성해 반독재 투쟁의 싹을 잘라 버리기 위해서였다.
‘칠레의 밤’에서 로베르토 볼라뇨는 피노체트 군사독재 정권에 협력해 필명을 날린 부역 문인들을 준엄하게 고발한다. 이바카체라는 사제이자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였던 인물을 내세워 “수많은 책을 읽고, 글을 갈고닦은 자”들이 벌였던 끔찍한 행태를 선연히 그려낸다. “폭격이 그친 후 대통령이 자살하고, 모든 것이 끝났다. 그때 나는 읽던 책에 손가락을 대고 평온한 상태로 생각했다. 참 평화롭군. 나는 일어나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정말 조용하군. 하늘은 파랬다. 그윽하고 깨끗한 하늘이었다. 멀리 헬리콥터 한 대가 보였다.”
전투기를 동원해 대통령궁을 폭격하고, 헬리콥터를 띄워 저항하는 시민들을 학살한 일이 그에겐 평화롭고 조용한 한낮의 풍경처럼 아늑하다. 가증한 일이다. 세련되고 우아하나 타락하고 오염된 부역의 언어는 사실을 은폐해 사태를 왜곡한다. 이에 맞서 네루다는 언어를 별렀다. “살인자가 시체를 어디에 묻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죽은 자들은 대지에서 나와/ 흘린 피를 되찾을 것이다.”
피노체트 집권 이후, 칠레 경제는 미국 등 외국 자본의 전적인 예속 아래 놓였고,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험장으로 전락했다. 군부와 결탁한 특권층과 외국인이 민영화라는 이름으로 마음껏 먹이를 약탈하는 가운데, 개발 독재가 진행되면서 급속한 경제성장을 누렸다. 그러나 그 달콤한 과실을 독점한 건 소수였다. 경쟁에서 탈락한 국민의 25%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극빈층에 속했다. 산티아고는 남미에서 (외국인이) 사업하기 가장 좋은 도시이면서 한때 전 세계에서 정신병 발병률이 가장 높은 도시이기도 했다. 그 무자비한 참혹함을 짐작하기 어렵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칠레대에서 문학을 가르치던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은 민주화 시위 대열에 참여했다가 쿠데타 와중에 죽을 뻔한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죽음과 소녀’에서 복수와 화해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이 작품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진실’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주인공 파울리나는 쿠데타 당시 자신을 체포해 고문했던 의사와 우연히 마주친다. 그는 고통을 덜어 주겠다면서 슈베르트 현악사중주 ‘죽음과 소녀’를 크게 틀어놓은 채 그녀를 강간했던 잔혹한 인물이다. 오랜 세월 악몽에 몸부림치던 그녀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를 알아보고는 복수의 열망에 사로잡힌다. 그를 때려눕혀 집 안에 감금한 파울리나는 진실을 밝히고 그의 사죄를 들어야겠다면서 그에게 권총을 들이민다.
겁에 질린 의사는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그녀의 착각이라면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민주화 투사였던 남편은 군사정권과 같은 방식으론 진실에 이를 수 없다면서 그녀를 뜯어말린다. 파울리나는 처절히 소리친다. “약자가 왜 항상 고통을 감수하면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는가?” 선량한 피해자는 여전히 기억에 짓눌려 끔찍한 나날을 보내는데, 독재에 협력했던 의사는 여전히 호의호식하면서 펜트하우스에서 살아간다.
피노체트는 쿠데타는 정당했고, 수많은 시민을 탄압하고 학살한 데 대해 아무 후회도 하지 않는다고 감히 말했다. ‘슬픈 칠레’를 떠올리며 도르프만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과거의 수인이 되지 않고 어떻게 과거를 살아 있게 할 것인가. 평화를 보장하려고 진실을 희생하는 것은 정당한가?” 과거를 부인하며 피해자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고, 방법이 틀렸다며 그녀를 머저리 취급하는 일이 화해의 길은 아닐 테다.
화해란 이름의 용서는 기억의 의무 다음에 온다. 기억 없는 미래는 진실의 은폐이고, 진상 규명 없는 역사는 거짓에 불과하다. 과거에 끝없이 얽매여 미래를 말하지 못하는 것도 어리석으나, 정의 없는 화해, 사과 없는 용서,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지 않은 채 미래를 말할 순 없다. 분명한 점은 하나다. 죽음의 연주 앞에서 공포에 질렸던 소녀 파울리나가 해맑은 웃음을 되찾지 못하는 한 산티아고에 내리는 비는 절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산티아고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하고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힌다. 그러나 극심한 불평등, 지리적 분열, 참혹한 대기오염이 이 도시의 미래를 계속 위협 중이다. 2019년 지하철 요금 인상을 계기로 분출해서 한 해 동안 지속된 ‘사회적 폭발’은 산티아고의 잠재 위기를 잘 드러낸다. 마지막 시집 ‘질문의 책’에서 네루다는 물었다. “땅 밑에서 정해진/ 장미의 약속은 언제인가?” 민중들의 숱한 희생 위에 세워진 이 도시는 이에 답할 의무가 있다.
문학평론가
■ 용어설명
초석전쟁
1879년부터 1883년까지 칠레, 페루, 볼리비아가 아타카마사막의 초석(질산칼륨) 광산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다. ‘태평양 전쟁’이라고도 한다. 버려진 땅이었던 사막은 볼리비아 소유였으나, 비료와 화약 원료로 사용되는 초석 광산의 발견과 함께 분쟁 지역으로 변했다. 1879년 칠레의 선전포고와 함께 시작된 전쟁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끼어든 국제전으로 발전했고, 영국 지원을 업은 칠레가 볼리비아를 무찔러서 최종 승자가 되었다. 초석은 1910년대 후반 인공 생산될 때까지 칠레 경제를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사회적 폭발
2019년 10월 18일,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 인상을 계기로 분출해서 한 해 이상 지속된 민중 봉기를 말한다. 살기 힘겨울 정도의 높은 물가에 잦은 공공요금 인상이 원인이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항의 시위가 일반 시민의 분노에 불을 붙이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는 노래를 부르면서 민중들은 고질적 양극화와 만연한 불평등에 항의해서 지하철역을 불태우고 상점을 약탈했다. 깜짝 놀란 정치가들은 피노체트 군사정권 시절 만들어진 헌법을 폐기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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