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4·3 희생자들에 대한 문제 제기는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됐다. 1998년 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사건이 “공산당의 폭동”으로 일어났다고 규정하면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누명을 벗겨줘야 한다”고 했다.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라고 규정하면서도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언급하며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에 뜻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해 12월 고건 국무총리는 진상조사 보고서에 대해 4·3사건의 “진상 규명과 희생자 유족들의 명예 회복”이 목적이지만,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는 않았다고 했다. 이러한 과정을 살펴볼 때, 제주 4·3의 비극은 아직도 그 교훈이 분명치 않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이정표 역시 분명치 않아 보인다. 과거와 미래가 모두 분명하지 않다면 그 비극은 또 반복될 수도 있다. 따라서 제주 4·3을 분명하게 정의하고, 그 교훈을 지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제주 4·3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 한반도에서 있었던 비극이다.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군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5년의 신탁통치 후 한반도에 한민족에 의한 독립국가를 세운다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소련의 점령정책은 한반도 전역을 자국의 위성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소련은 김일성을 앞세워 신속하게(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남한에는 남로당을 조직해 박헌영이 지휘케 했다. 소련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반도를 인민민주주의 국가로 만들려고 했고, 그 하수인들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 1947년 3·1절 행사와 1948년 4·3 무장봉기는 비극의 출발점이 됐다.
21세기에 되돌아보는 제주 4·3의 교훈은 무엇일까?
첫째, 국제 정세에 대한 무지는 큰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전반에 공산주의는 민족해방운동을 선전하며 약소민족을 공산주의 진영으로 유도했다. 하지만 이 진영에 들어간 어느 나라도 자유와 번영을 맛보지 못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연이은 소련의 붕괴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결정적인 종점을 찍은 것이다.
둘째, 국민 내부의 이념적인 갈등이 폭력적이어서 내전 상황으로까지 진전되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지를 절실히 실감할 필요가 있다. 제주 4·3에서 희생은 진영을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 진영의 양측 모두 희생이 초래될 수밖에 없었다. 봉기한 유격대는 치안 유지에 책임을 진 군인과 경찰들을 희생시켰다. 군경은 또한 토벌 과정에서 유격대 가담자들을 희생시켰다. 그 와중에 진영과 무관한 제주의 민간인들 역시 상당한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셋째, 주권의 소중함을 인식해야 한다. 국가의 독립성 유지와 국민 공동체의 지속적 유지는 주권의 안정적 유지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며 필수다. 제주 4·3으로 경험한 상처가 국민을 계속 분리하고 이를 확대하는 역할을 하도록 해선 안 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국민적 정체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나 시민단체들은 국민을 분열 선동하는 수법을 더는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이정표는 제주 4·3의 교훈을 깊이 새겨야만 비로소 바로 세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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