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前 이화여대 교수

옛 선인,‘용’을 ‘물’이라 불러
조형예술서 증명…기막힌 일치

물 상징 용, 화마 막을 유일 방법
근정문에서 ‘붉은 부적’ 찾아내

水 자세히 보니 한자 龍 1000개
‘물이 곧 용’증거 일목요연 제시


‘미르’가 ‘물’이라면, 용은 물이다.

2000년 9월, 국립경주박물관 강당에서 퇴임 기념 강연이 있었다. 신라 기와 가운데 귀신의 얼굴을 새긴 기와(鬼面瓦·귀면와)가 귀신 얼굴이 아니고, 용의 얼굴을 표현한 기와(龍面瓦·용면와)라는 것이 주제였다. 당시 비상한 관심과 논쟁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용에 관한 연구가 지금까지 20여 년째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내 학문과 예술은 매일매일 진전이 이루어져서 나의 사상은 그 완성의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러나 도대체 용이 무엇이길래 인류의 문화 판도를 뒤집고 있다는 말인가. 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올바로 아는 사람도 없다. 그 험난한 개척의 몫은 나에게 주어졌다.

순수 우리말로 용을 ‘미르’라고 부르고 있다는 말을 듣는 찰나에 떠오른 것은 바로 ‘물’이었다. 그렇다면 ‘용은 물’이라는 뜻이 된다. 우선, ‘미르’는 발음상 ‘물’로 통하지 않는가. 조형예술로 용이 곧 물의 형상화임을 터득한 상황이었으니 즉각 ‘미르’는 ‘물’이라 본능적으로 생각이 들어서, 국문과 교수인 친구와 친분 있는 언어학과 교수에게 그 가능성을 타진했더니 각각 다음과 같이 부정적인 응답이 왔다.

①‘물’(水)은 고대 국어 표기로는 ‘買’ ‘勿’ ‘沒’이며, 그 추정발음은 ‘미’ ‘메’ ‘믈’ 등이지만, ‘미르’는 없다. ②‘미르’ 또는 ‘미리’는 용의 고유어다. 미더덕이나, 미나리 등으로 보아 ‘미’가 물일 가능성은 있지만 ‘미르’가 물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만일 추정발음에 ‘믈’이 있다면 ‘물’이란 발음도 가능할 터인데 모두 동의하지 않았다. 이른바 인문학자는 주로 문헌을 찾아 연구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문자언어로 기록된 문헌의 한계를 통감하고 있는 나로서는 문헌에 그리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다. ‘미르=물=용’이란 삼각관계를 논리적으로 증명한다면 중대한 토론일 것이다. 그런데 진리는 문자언어로만 표현되지 않으며, 또 문자로 모든 것을 기록해 둘 수는 없다. 평생 예술품 자체에서 정답을 구하여 오히려 문자언어로 기록된 문헌의 오류를 수정해 오고 있다. 강연 때마다 가끔 받는 질문이 있다. “오늘 강연 내용이 어디 문헌에 있습니까?” 있을 리 없다.



물론 ‘용’을 바로 ‘물’이라 부를 수 없지만, 옛사람이 용을 물로 인식할 수 있어서 ‘미르’ 즉 ‘물’이라 불렀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일 조형예술품에서 용이 물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미르’가 ‘물’을 가리킬 가능성은 더욱 크다. 서울의 두 교수가 보내온 답은 문헌에 있는 것을 찾아서 얻은 것이라, 그런 지식은 나도 10분이면 알아듣지만, 용이 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것’은 몇 년이 걸린다. 인류 문화의 운명뿐만 아니라 나의 운명도 걸린 만큼 용이 물이라는 진리를 터득하려면 10년 걸린다고 해도 그리 오랜 기간이 아니다. 나는 용 연구자일 뿐만 아니라, 용이 물을 상징하므로 그와 관련하여 물 연구자이기도 하다. 과학자로서가 아니라 철학적 측면에서 용과 물을 함께 연구하며 조형예술을 풀어 나가고 있다. 서양 철학의 아버지인 탈레스는 단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 말했다는데, 내용은 전해지지 않아 물에 관한 나의 철학이 그 내용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여 대구 계명대 사학과 김권구 교수를 통하여 친한, 국문학자가 아닌 국어학자 손인호 박사가 찾아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내주어 간추려서 싣는다.

③미르(龍, 물)의 어원(語源) 출전

1. 최세진(崔世珍, 1468∼1542)의 ‘훈몽자회(訓蒙字會)’, 1527년, 상(上) 20쪽. “龍→미르, 룡”이라고 함. ‘미르(龍)’는 물(水)과 연관이 있다. 2.‘미르’→‘믈이’의 변형. 3. 물(水, 雨)은 고어(古語)에 ‘미’ ‘밀’ ‘믈(샘이 기픈 믈<용비어천가 2, 34> )’ ‘미리’ 등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미나리(‘물(水)나리’의 의미. 두시언해 초간본 15, 훈몽자회 상 13쪽), 미더덕(물(水)더덕), 미역(물(水)역), 미리내(銀河水, 龍泉)→‘미리(龍)’(정약용, 아언각비(雅言覺非)+내(川).

받아서 읽어 보니 ‘미르’가 ‘물’임이 자명해졌다. 옛 선인은 용을 보고 ‘물’이라고 불렀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내가 처음으로 조형에술에서 용이 물임을 증명했으니 기막힌 일치다. 내 친구에게 다시 묻기를, 만일 용이 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면 받아들이겠는가? 그러면서 대원군이 임진왜란 때 전소한 대규모 목조건축인 경복궁을 중건시키면서 가장 두려워한 것이 불가항력의 화마(火魔)였다. 그 화마를 막는 방법은 ‘물을 상징하는 용’ 이외에는 없어서 근정문(勤政門)의 상량문에서 ‘용 그림과 함께 나온 부적’ 같은 작품들을 이야기했다.

붉은 종이에 먹으로 물 수(水)란 글씨를 찍었는데 자세히 보니 龍이란 글씨 1000개가 모여 있으므로, ‘물이 곧 용’이란 증거를 이처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그러나 낯선 그림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근정전에서 발견된 그 부적 같은 붉은 종이는 인류문화뿐만 아니라 내 학문에 운명적인 전환을 일으켰다. 그 부적은 함께 발견된 용 그림과 함께 지구의 어느 곳이든 요원의 불길 같은 난공불락의 화마를 막을 유일한 방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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