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강원 강릉시 아이스 아레나에 마련된 산불 피해 임시 대피소에서 최영주(44) 씨가 딸 우승연(11) 양을 안아주고 있다. 최 씨는 갑자기 들이닥친 산불에 아기 약과 핸드백만 가지고 서둘러 몸만 빠져나왔다며 앞으로의 생활이 막막하다고 말했다.  문호남 기자
12일 강원 강릉시 아이스 아레나에 마련된 산불 피해 임시 대피소에서 최영주(44) 씨가 딸 우승연(11) 양을 안아주고 있다. 최 씨는 갑자기 들이닥친 산불에 아기 약과 핸드백만 가지고 서둘러 몸만 빠져나왔다며 앞으로의 생활이 막막하다고 말했다. 문호남 기자


■ 화마 덮친 강릉 민가

불 탄 자기집 대신 옆집 불끄고
목발 짚은채 동네사람 피신시켜
외국인 이웃, 연신 “고맙습니다”

100곳 넘게 잿더미 ‘망연자실’
사망 1명… 경미한 부상 15명


강릉 = 전수한·유민우 기자

“한 손으론 목발을 짚고, 한 손으론 현관문을 두들겨가며 사람들을 대피시켰지요. 살아도 다 같이 살아야 하니까요.”

강릉시 안현동에 거주하는 김홍기(59) 씨는 11일 오전 8시 30분쯤 까만 연기와 빨간 불꽃이 인근 펜션을 순식간에 뒤덮는 장면을 목격했다. 15년 전 병으로 두 다리를 잃고 의족과 휠체어에 의지하는 김 씨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펜션에 사는 다른 주민들에게 화재를 알리러 다녔다. 늦은 근무로 잠에 빠져 있던 우즈베키스탄 국적 이웃을 두들겨 깨워 간신히 대피시켰다. 12일 짐을 찾기 위해 다 타버린 펜션에서 김 씨와 만난 외국인의 남편은 서툰 한국어로 “고마워요, 고마워요”라며 김 씨에게 연신 머리를 숙였다.

8시간 동안 대규모 삼림과 주택을 불태운 강릉 대화재에도 주민들이 서로서로 화재를 알리고 신속히 대피하면서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산불순찰대원인 70대 박양길 씨는 산불 감시를 하다 불이 난 것을 보고하고 신속하게 집으로 향했다가 자신과 이웃의 집이 불타고 있는 것을 봤다. 대피하라는 문자가 왔지만 눈앞의 불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그는 아내와 사위 등 가족을 총동원해 세숫대야와 호스로 주변에 붙은 불을 껐다. 박 씨 가족의 분투 결과 폐허가 된 안현동 일대에서 박 씨와 그 이웃들의 집은 비교적 멀쩡할 수 있었다. 박 씨는 “불 난 게 뻔히 보이는데 도망갈 수가 없었다”며 “아무리 힘없는 시민이라도, 내 집과 내 이웃은 내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컸다”고 말했다. 강릉시청 관계자는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도 대피령에 적극 협조하고 서로서로 도운 주민들 덕분에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화재 규모가 워낙 컸던 만큼 화마를 피하지 못한 주민들 사이에선 여전히 한숨이 이어지고 있다. 주불이 진압된 뒤 간신히 자신이 살던 펜션을 찾은 김 씨는 의족을 이끌고 잿더미 속에서 고혈압 약·교체용 의족 실리콘·성경책 등을 챙겼다. 불길로 타버리거나 재를 뒤집어써 더는 못 쓰게 된 생필품들이 태반이었다. 두 다리가 없는 김 씨의 ‘재산목록 1호’이자 ‘발’이었다는 전동 스쿠터도 전부 타버렸다. 김 씨는 “저렴한 월세에 감사해 하며 2년 동안 살았던 집인데, 이제 어디 가서 뭘 해먹고 살아야 하나”라며 한숨을 쉬었다. 이 펜션은 이번 화재의 유일한 사망자 전모(88) 씨가 운영하던 곳이다. 전 씨는 불을 끄려고 물을 길어오는 등 펜션에서 가장 늦게 빠져나오다가 변을 당했다고 한다. 세입자들과 이웃 주민들은 각종 상담을 들어주는 마을의 ‘어르신’ 같은 분이었다며 눈물을 훔쳤다.

이날 경포대 앞 펜션촌은 폐허로 변해있었다. 유리창이 깨진 잔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건물 내부 콘크리트는 열기로 일그러진 상태였다. 펜션 앞에 주차된 차량은 가죽이 완전히 타 뼈대만 남았다. 경포대 인근에서 20년 넘게 펜션을 운영해왔다는 이명규(58) 씨는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불똥이 나무와 잔디 등에 옮겨붙어 순식간에 펜션을 홀라당 다 태워버렸다. 펜션은 집이면서 동시에 직장이었는데 이젠 뭘 하고 살아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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