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카페 - 김헌·김월회의 고전 매트릭스 - (25) 국가 지도자와 술

서경 ‘주고편’

‘술 탓에 천자는 천하를 잃고
필부는 자신을 잃는다’ 풍자

무왕이 아우를 제후에 봉하며
‘술과 늘 함께 하지 말라’ 당부
서경 ‘주고편’에 술을 경계해


피아니스트 출신 변호사는 소주를 마실 때면 줄곧 와인 잔에 따라 음미하며 마셨다. 얼마 전에 종영한 한 드라마에서 반복됐던 장면이다. 그 장면을 접할 때마다 올해 초 소주 가격이 오른다고 했을 때 나왔던, 소주가 이젠 서민의 술이 아니게 되었다는 푸념이 절로 떠오르곤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간 우리는 술을 참으로 ‘저렴하게’ 대접해왔다.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오면 십중팔구 소주병이 서너 개씩 놓여 있곤 한다. 병나발을 부는 장면도, 맥주잔에 따라 벌컥벌컥 마시는 장면도 곧잘 등장한다. 소주뿐 아니라 빈티지 좋은 와인이나 고급 위스키마저도 그렇게 들이켜곤 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음주로 인한 피해가 흡연으로 인한 피해보다 훨씬 크고 심각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드라마 등의 음주 장면을 보면 술은 마구마구 소비된다. 흡연 장면은 꼬박꼬박 모자이크 처리되지만 음주 장면은 거침없이 방영된다. 금연 캠페인은 국가 차원에서 수십 년째 지속하고 있지만 금주운동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음주에 대하여 우리 사회는 하염없이 너그러웠다.

그렇다고 아무 근거 없이 너그러웠던 건 아니다. 술에는 무언가 특별함이 담겨 있기에 그러하다. 이를테면 술에는 ‘지금, 여기’를 초월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내장되어 있다. 술은 여의하지 못한 삶의 시름으로부터, 무도하고 불의한 현실로 인한 울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그저 술기운에 취해 잠시 잊고 마는 것이 아니다. 문제적 현실을 극복하는 길을 헤아릴 수 있도록 숨통을 터주기도 한다. 때로는 인간이기에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를 넘어 참된 진리의 경지에서 노닐게도 한다.

그 덕분에 혼탁하기 그지없는 세상을 살았던 도연명이란 큰 시인은 ‘음주’라는 제목으로 20수의 연작시를 지음에, 그 어디서도 술 내음을 풍기지 않은 채 맑고 고아한 경지를 노래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취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서의 얘기다. “술은 한도를 정해 놓고 마시지는 않았지만 흐트러짐에 이르지는 않았다”(‘논어’)는 공자의 태도가 반드시 지켜야 할 음주의 모범이었다. 마음가짐, 몸가짐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지 않아야만 술이 지니는 특별한 힘이 온전히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한비자’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춘추전국시대 송나라에 소적매란 이가 있었다. 하루는 취하여 자다가 가죽옷을 잃어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군주가 놀렸다. “취하면 가죽옷도 잃어버릴 수 있구려.” 그러자 소적매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옛적 하나라의 걸왕은 취하여 천하를 잃었습니다!” 그러고는 “늘 술을 마시면 천자는 천하를 잃게 되고 필부는 그 자신을 잃게 됩니다”라며 술을 밝혔던 군주를 풍자했다. 이때 소적매는 “술병에 늘 술을 채워두지 말라”는 옛말을 가져와 자신의 풍자에 권위를 더했다.

이 말은 흔히 “술과 늘 함께하지 말라”고도 풀이되는 구절로 ‘서경’ 주고(酒誥) 편에 실려 있다. ‘주고’는 “술에 대한 권계”라는 뜻으로, 여기에는 3000여 년 전 무왕이라는 천자가 아우 강숙을 제후로 봉하면서 술을 경계하는 내용이 절절하게 담겨 있다. 당시 제후는 천자를 대신하여 일정 지역의 통치를 대신했던 정치지도자였다. 이러한 제후가 통치하는 지역을 ‘국(國)’이라고 불렀으니, 제후는 오늘날로 치면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에 해당한다. 무왕은 그렇게 크고도 무거운 자리에 임명된 강숙에게 대국이든 소국이든 상관없이 술 때문에 망했고, 백성에게 신망을 잃음도 술 때문임을 명토 박았다.

반면 조상들이 천명을 받아 왕조를 건설할 수 있었음은 작은 덕과 큰 덕을 한결같이 쌓은 결과임을 강조했다. 군주가 멀리할 것은 술이요, 가까이할 것은 덕이라는 뜻이었다. 역사를 보면 군주는 술을 마실수록 덕이 깎여 나가고 그렇게 나라도 깎여 결국은 망하게 된다는 경고였다. 적어도 정치지도자에게 술은 작게는 자신의 덕을, 크게는 국가를 잃게 하는 독물이었던 셈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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