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원폭탄에 신음하는 대한민국 - 식품안전정보원·영등포구청 르포

식품안전정보원에 만취 전화
신고 내용 뭐냐고 묻자 “없다”
성희롱 발언 중단을 요청하니
“불쾌하다고?” 비웃듯이 반응

영등포구청 앞 매일 오후 3시
2년 넘도록 철거대책위 시위중
재개발 보상 불만에 집단 민원
직원 5 ~ 6명 1층 ‘방패조’ 대기
계단 밑 끌어내려져 큰 부상도


“전 여자가 좋아요. 특히 가슴 큰 여자가 좋아요. 상담사님이 뚱뚱할 수도 있고, 말랐을 수도 있지만…불쾌하다고요? 참나.”

불량식품 관련 신고를 접수하는 식품안전정보원 상담원에게 최근 걸려왔던 통화다. 민원인은 술에 잔뜩 취한 상태로 횡설수설하는 와중에 성희롱까지 일삼았다. 상담원은 침착하게 “불량식품 관련 신고가 있냐”고 거듭 물었지만, “그런 건 없다”고 말하며 끝까지 통화를 끊지 않았다. 성희롱 발언에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제가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고 호소하니 “불쾌하다고요? 참나”라며 비웃는 듯한 반응이 돌아왔다. 무의미한 통화는 장장 11분 동안 이어졌다.

◇4시간 동안 불만 쏟아내는 민원인

지난달 말 찾은 불량식품 관련 신고를 접수하는 식품의약품안전처 산하기관인 식품안전정보원은 황당 민원, 악성 민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반복 전화, 주취자·장시간 통화자 등 내부적으로 ‘주의 민원’으로 분류한 민원이 전체의 7.3%나 된다.

소위 ‘빌런(요주의 민원인)’으로 불리는 사람도 있다. 현재 가장 악명이 높은 빌런은 지난 2017년부터 해결이 불가능한 사안으로 240여 건의 민원을 넣은 40대 남성 A 씨다. 한번 걸려왔다 하면 말을 빙빙 돌리며 1시간은 기본이고, 한번은 4시간까지 통화를 끊지 않은 적이 있어 모니터에 A 씨의 번호가 뜨면 상담실은 침울해진다. 이런 요주의 민원인은 지난해 기준 2809명이나 된다. 이 외에도 1399(식품안전정보원)를 1339(질병관리청)로 잘못 보고 전화해 “질병관리청장을 바꾸라”며 소리 지른 사례, 우거지 사골국에 된장이 아니라 왜간장을 넣었다며 신고를 했는데 접수가 안 됐다며 “X년아”라고 고성과 욕설을 한 사례도 있었다.

불량식품과 관계없는 민원이 지속될 경우 3회 경고 후 통화를 끊어도 된다는 규정은 있다. 그러나 민원 업무 특성상 이러한 규정은 유명무실하다는 것이 현장의 목소리다. 경고 후 전화를 끊어도 곧바로 다시 걸려오기 일쑤고, 심지어 국민권익위원회 등 다른 기관에 신고해 업무량이 더 늘어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이날 만난 상담사 이모(31) 씨는 “‘빌런’의 번호가 모니터에 뜨면 그때부터 심장이 쿵쾅쿵쾅 박동하기 시작한다”면서 “악성 민원을 받으면 처음엔 화가 나는데, 끊고 나면 우울해진다. 저 사람이 악질 민원인이 아니라 내가 진짜 잘못한 게 아닌지 스스로에 대한 의심에 빠지기도 한다”고 했다.

◇악성 민원에 셔터 내리며 안간힘

서울 영등포구청도 악성 민원인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달 말 찾은 구청은 매일 오후 3시만 되면 ‘전투준비태세’에 돌입한다. 구청장실이 있는 3층엔 철제 셔터가 내려가고, 구청 직원 대여섯 명은 1층에 내려가 ‘방패조’가 돼 대기한다. 전국철거민연합회 영등포철거대책위원회(철대위)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같이 시위하러 찾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3시가 되면 밀고 들어오려는 철대위와 이를 막으려는 구청 직원들 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철대위는 억지성 민원인이 악질 시위대로 변질된 경우다. 지난 2019년 구청이 영등포시장 1-13구역 재개발사업의 시행계획을 인가하고 2021년 관리처분에 들어가자, 보상이 성에 차지 않은 노점·세입자 상인들이 ‘이주대책’을 마련해달라고 구청에 민원을 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법적인 근거가 없는 ‘생떼’라는 게 구청의 설명이다. 도시 및 주거환경관리법에 따르면, 재개발사업에서 구청의 역할은 허가를 내고 영업이익을 산출하는 데 그친다. 재개발사업은 민관이 함께 주도하는 만큼, 재개발 후의 이주대책은 이들이 속한 조합에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청은 이미 감정평가사의 검토를 받아 보상안을 내기도 했다.

악질 시위대로 변한 이들은 2년째 구청 앞에서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오후 3시만 되면 머리에 빨간 두건을 두르고 조끼를 입은 철대위가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한다. 오토바이와 차량을 구청 앞 도로에 아무렇게나 주차해두고, 구청 앞 벤치에 주저앉아 가스버너로 주전자 물을 데워 믹스커피를 타 먹기도 했다. 구청 관계자는 “구청을 찾아오는 민원인 중 8할은 첫 방문인데, 구청에 문제가 생긴 줄 알고 그냥 돌아가는 민원인도 많다”며 “매일같이 구청 직원들이 업무를 미룬 채 시위대를 막아야 해 행정력 낭비가 심하다”고 했다.

전수한 기자 haniha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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