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권 사회부 차장

대학이 ‘진리의 상아탑’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상아탑은 속세를 떠나 학문이나 예술에만 잠기는 경지.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생트뵈브가 세속 생활에 관심 없던 낭만파 시인 알프레드 드 비니의 예술지상주의 태도를 비평한 데서 유래한다. 국내에선 순수 학문을 지향하는 대학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요즘엔 상아탑이란 표현이 잘 쓰이지도 않지만, 대학에 붙이기도 어색해졌다. 대학 상황을 보면 이해가 간다. 우선, 초등학생부터 준비한다는 의대를 비롯해 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가 모든 학생과 학부모의 최우선 목표가 됐다. 이른바 ‘의치한약수’가 없는 대학들은 학령인구 감소에 오랜 등록금 동결로 존폐 위기에 처한 만큼 앞뒤 잴 겨를이 없다. 당장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학과를 내걸고, 높은 취업률을 내세워 입학해 달라고 사정하는 분위기다. 각 대학은 최근 잘나가는 산업 분야인 반도체, 미래자동차, 로봇, 차세대 2차전지 등의 첨단 기술과 연관된 각종 융합 학과를 유치하거나 통합하느라 바쁘다.

대학에선 실용 학문이 대세인 수준을 넘어서 필수가 됐다. 문제는 많은 학생이 대학 진학 시 진리 탐구보다는 취업과 돈벌이를 위해 기능적으로 실용 학문을 선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학이 취업학원과 다를 바 없어졌다. 상당수 대학 교수들은 연구와 교육을 잘하는 게 최우선이 아닌 상황이다. 얼마나 많은 제자를 취업시켰는지가 더 중요해지고, 유능한 교수로 평가받는 지표라고 한다.

그사이 인문학은 사라지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국내 인문계열 학과는 2012년 976개에서 2020년 828개로 감소했다. 최근 5년 사이에 학부 과정의 인문학 전공 단위(학과)는 16%가 폐지됐고, 사회과학 전공 단위는 8%가 사라졌다. 선호도가 높은 서울 소재 대학에서도 2019∼2022년 사이 인문사회 계열 학과 17개가 폐과됐다. 특히, 전국의 철학과는 2011년 80개에서 2021년 60개로 25%나 감소했고, 입학정원은 같은 기간 40% 가까이 줄었다. 문과뿐 아니다. 이공계에서도 물리학·화학·지질학·해양학 등의 핵심 기초과학 전공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정부는 의대 쏠림에 따른 첨단 인재 유출과 부족에는 신경을 쓰지만, 인문학 붕괴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정부 연구 예산은 여전히 과학기술 분야에 편중돼 있다. 인문사회의 학술 연구에 대한 지원은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의 1% 남짓에 그친다. 영국은 정부 연구위원회 예산의 9% 이상, 미국은 국립과학재단·국립인문기금 연구지원 예산의 약 7%를 인문사회 분야에 할당한다.

물론 첨단 인재는 매우 중요하다. 실용 학문을 홀대해선 안 된다. 다만 인문학이 소외되지 않는 학문적 균형이 필요하다. ‘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를 창안한 클라우스 슈바프는 기술 발전이 초래할 불평등의 심화와 소외의 확대를 미래사회에 도래할 중요한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이미 인공지능(AI)의 일자리 침공이 시작됐다. 인류가 기술에 끌려가지 않고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상황을 적시(摘示)하고 운용할 수 있는 인문학적 사유가 필요하다. 이대로 가면 대한민국은 AI에 대부분의 일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
이용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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