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사진) 한국은행 총재가 “시중의 유동성 위기에 대응해 한은이 공급 역할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한다”고 12일 밝혔다. 경상수지 적자가 고착화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반영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이 총재는 이날 오전 서울 중구 한은 본부에서 열린 창립 73주년 기념사에서 “대내외 경제구조가 달라지면서 경상수지 기조는 물론 적정 유동성 규모 등이 변화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동성 조절도 흡수 일변도에서 벗어나 평상시에도 탄력적으로 유동성 공급이 가능하도록 제도나 운영 방식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총재의 발언은 반도체와 대(對)중국 수출이 부진의 늪에 빠지면서 만성적 경상 적자 위험이 짙어지고 있는 상황과 관련이 깊다.
우리나라는 상품수지 흑자로 서비스수지 등의 적자를 상쇄하는 구조에 힘입어 경상수지 흑자국 타이틀을 지난 30여 년간 이어왔다. 기조적인 경상 흑자로 대규모 유동성이 공급돼 왔기 때문에 한은의 유동성 관리 역시 ‘흡수’에만 초점이 맞춰져 왔다. 그러나 경상수지는 올 1월 -42억1000만 달러 적자를 낸 뒤 2월(-5억2000만 달러), 4월(-7억9000만 달러)에도 적자를 기록했다.
이 총재는 또한 비은행 금융기관 부실 관련 감독기관과 정책 공조 강화, 대출제도 위기 시 정책수단 확충 등을 주문하면서 제도 개선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저출산·고령화 등 내부 요인뿐 아니라 팬데믹 이후 뉴노멀, 세계 경제의 분절화, 지정학적 갈등, 인공지능 등이 경제 전반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며 “새 환경에 맞게 과감히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특히 “비은행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권이 없다고 방치할 수 없다”며 비은행 금융기관에 대한 정책 공조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비은행 금융기관의 수신 비중이 이미 2000년대 들어 은행을 넘어섰고, 한은 금융망을 통한 결제액 비중과 은행·비은행 간 연계성도 커졌다”며 “지금처럼 은행만을 대상으로 해서는 국민경제 전체의 금융 안정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당부했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로 확인된 빠른 속도의 뱅크런(대규모 자금 인출)에 대한 대비도 강조됐다. 이 총재는 “새 환경에 대응해 상시적 대출 제도 등 위기가 감지될 경우 즉각 활용할 수 있는 정책 수단의 확충을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