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위 사진부터 시계 방향으로)‘오징어게임’의 황동혁 감독, ‘더 글로리’의 김은숙 작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문지원 작가,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 그래픽 = 권호영 기자
■ K-콘텐츠 ‘넥스트 스텝’ - (1) ‘이야기꾼’을 키워라
‘춘향뎐’ 칸 입성 임권택·‘기생충’ 상 휩쓴 봉준호 글로벌 시장에 K-컬처 알린건 무엇보다 ‘맨파워’
‘킹덤’ 조선 좀비 열풍…‘더 글로리’ 학폭도 전세계 공감 5000년 역사 한국은 크리에이터들의 ‘이야기 보고’
할리우드는 집단창작 체제지만, 韓은 개인역량 중시 K-콘텐츠 지속성장 위해 신진작가 등 발굴 힘써야
지난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4관왕에 오른 봉준호 감독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고 했다. 인간은 소우주다. 개개인의 삶은 각각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고, 각자가 속한 국가와 사회, 문화가 고스란히 담긴다. 이러한 개인의 기억과 추억을 타자화시키고 서사로 엮는 사람이 바로 ‘이야기꾼’이다. K-콘텐츠는 조직적인 톱다운(Top-down) 방식이 아니라 이야기꾼 개개인의 역량이 모인 독특한 보텀업(Bottom-up)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이런 이야기꾼들이 일군 K-콘텐츠가 2022년 거둔 매출은 148조1607억 원(한국갤럽 기준)으로 역대 최고치다. 전년 대비 7.7% 증가하며 K-콘텐츠 시장이 여전히 ‘블루오션’임을 웅변했다. 그래서 지속 가능한 K-콘텐츠의 성장 동력으로서 새로운 이야기꾼을 발굴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이야기 寶庫에서 자란 이야기꾼들
2020년대 들어 글로벌 시장에서 K-스토리의 활약은 눈부시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크리에이터들에 대한 러브콜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과 만난 넷플릭스 테드 서랜도스 CEO는 향후 4년 동안 25억 달러(약 3조 원)를 한국 콘텐츠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넷플릭스 시청자 중 60%가 한국 콘텐츠를 소비한 결과다.
K-스토리를 세계에 알린 이들은 ‘개인’이었다. 한국인 최초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임권택 감독을 시작으로 박찬욱·봉준호·황동혁 감독, 김은숙·문지원 작가 등은 개인의 힘으로 세상을 움직였다. 한국 ‘소프트파워’의 젖줄은 ‘맨파워’인 셈이다.
K-이야기꾼은 왜 각광을 받을까. 이는 한류 30년을 통해 쌓은 K-콘텐츠의 경쟁력과 늘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할리우드의 소재 고갈이 맞물린 결과다. 여기에 다양성에 대한 문화적 요구가 가세하면서 K-콘텐츠가 급부상했다. 넷플릭스 첫 한국 오리지널인 ‘킹덤’은 조선을 배경으로 신분제 사회의 특징을 강조하며 독특한 질감을 가진 K-좀비물로 탄생됐다. 이런 계급 역사를 아우르는 관점은 영화 ‘기생충’에도 반영됐고, 한국의 분단 상황은 ‘사랑의 불시착’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드라마 ‘파친코’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은 한국 이민자 4대의 사연을 대서사시로 펼쳤다. 이 외에도 학벌주의와 학교 폭력 등 사회적 문제를 꿰뚫은 ‘지금 우리 학교는’과 ‘더 글로리’ 역시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글로벌 사회에 파장을 끼쳤다. 국내에서는 ‘신파’라 불리던 K-콘텐츠 특유의 가족애와 인간미가 글로벌 시장에서 “새롭다”는 반응을 얻기도 했다.
그 결과 방송 분야 K-콘텐츠 성장세는 눈부시다. 지난해 총매출은 25조8268억 원으로 음악·영화 등을 제치고 1위다. 전년과 비교해도 7.7%가량 증가하며 안정적인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킹덤’시즌2
◇노동집약적 K-콘텐츠 산업의 첨병, K-이야기꾼
하지만 최근 곳곳에서 경고음이 들린다. 충무로는 “극장이 위험하다”고 외치고, 드라마 시장에서는 “투자가 안 된다”고 아우성이다. 넷플릭스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흥행 실패 사례가 잦아지며 “K-콘텐츠가 예전 같지 않다”는 반응이 적잖다.
극장의 위기는 팬데믹 여파와 부쩍 오른 관람료 등이 원인으로 꼽히지만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이야기꾼의 이탈’이다. 박찬욱, 봉준호를 비롯해 ‘오징어게임’의 황동혁, ‘킹덤’의 김성훈, ‘지금 우리 학교는’의 이재규 모두 영화감독 출신이다. 이들을 비롯해 숱한 우수 인력들이 자본력이 뒷받침되는 외국 작품의 연출을 맡거나 OTT로 눈을 돌렸다. 이러한 이야기꾼들의 공백은 충무로를 허약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OTT 콘텐츠의 실패는 어디서 기인할까. 한국 오리지널 작품으로 재미를 본 넷플릭스는 투자 규모를 부쩍 늘렸다. 하지만 “아쉽다”는 반응을 얻은 콘텐츠가 많다. 최근 공개된 ‘택배기사’를 비롯해 과학소설(SF)물 ‘정이’ ‘종이의 집’을 리메이크한 ‘종이의 집:공동경제구역’ 등이 글로벌 톱10 TV(비영어) 부문 1위에 올랐지만 호불호가 엇갈렸다. K-콘텐츠에 대한 기대감으로 앞다투어 선택하면서 초기 성적은 뛰어났지만, 반응은 금세 식었다. 박기수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2019년 이후 생산 능력을 웃도는 많은 콘텐츠를 쏟아내면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 많아졌다”며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도 치열해지는데 숙련된 작가·감독 등 이야기꾼이 부족하니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K-콘텐츠 산업에서 이야기꾼이 유독 주목받는 이유는 노동집약적 성격 때문이다. 할리우드는 집단 창작 시스템이 일반적이다. 마블 히어로 영화를 만들 때 수십 명의 스토리 작가 외에도 각 히어로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작가들이 붙는다. 영화 한 편을 만드는 데 수십 명의 작가가 참여한다. 시리즈 드라마를 집필할 때는 회차별 작가들을 따로 둔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메인 작가 1명이 보조 작가 몇 명을 두고 홀로 대본을 쓴다. 개인의 재능과 역량이 더욱 중시되는 이유다. 이는 방송 분야 종사자 수에서도 드러난다. 2022년 방송 분야 종사자 수는 약 5만 명으로 전체 K-콘텐츠 종사자 중 8.2%에 불과하다. 게다가 지난해 하반기는 상반기보다 종사자 수가 2.7%가량 줄었다. 산업 성장률과 반비례하며, 노동 강도가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제작 시스템에 대한 업계 평가는 엇갈린다. 한쪽에서는 “제작비를 낮추고 소통 창구를 일원화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긍정론이 나온다. 역량 있는 작가들이 책임지고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하는 시스템은 오히려 세계 시장에서 K-콘텐츠의 강점 중 하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크리에이터들이 지나치게 소모되고 유명 작가가 고집을 굽히지 않고 독단적으로 집필하다가 작품을 망친 경우도 있다”는 비판도 만만찮다.
박 교수는 “이러한 한국의 제작 시스템에는 일장일단이 있다”면서 “할리우드는 작가팀이 구성돼 움직인다. 여러 의견을 수렴해 최상의 결과를 도출하니 실패작도 적지만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반면 개별적인 작가나 감독의 반짝이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하는 한국 콘텐츠는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지 않는다. 역량 있는 작가나 감독을 끊임없이 발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