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더=박준우 특파원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조선 사신단은 온갖 고초를 겪으며 황제가 있던 열하(청더)에 도착했다. 당시 황제는 사신단에게 역시 열하를 찾아왔던 티베트의 지도자 판첸 라마를 만날 것을 명한다. 티베트 지역을 통치하고, 티베트 불교의 영향력이 강한 몽고족 등을 다스리는 데 아미타불의 현신으로 인정받던 판첸 라마의 힘을 빌리기 위해 그의 위상을 키워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억불숭유의 가치를 내걸고 있는 조선 사대부에겐 곤란한 문제였다. 불교인을 우대하는 행동이 정치 쟁점화됐을 때 어떤 파장이 있을지 알았던 사신단 대표 박명원은 결국 판첸 라마에 절하는 것을 거부한다. 황명을 거역한 죄로 목숨을 잃더라도 논란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다. 타국 문화에 개방적이었던 그의 자제 군관(개인 수행원) 박지원도 판첸 라마로부터 선물받은 불상을 몰래 버리기 위해 고민할 정도로 불교에 개방적인 태도는 조선에서 공격받기 좋은 행위였다. 이 같은 상황은 사신단의 공식 보고서엔 적혀 있지 않지만, 박지원이 귀국 후 3년 뒤인 1783년 펴낸 ‘열하일기’를 통해 후세에 남았다. 일각에선 이를 한반도와 티베트 불교 간의 첫 공식 만남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현재 청더(承德)의 판첸 라마 거처 반선행궁(班禪行宮·수미복수지묘)는 한국 관광객에겐 달라이 라마를 위한 임시거처 소포탈라궁(小布達拉宮)보다 더 인기 있는 장소가 됐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나온 지 240년이 지난 2023년, 한국과 티베트가 또 한번 얽히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초청으로 한국 의원들이 문화교류 방중단을 꾸려 티베트를 방문한 것이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억불숭유’의 가치관을 벗어난 만큼 티베트의 방문이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지금 티베트의 상황을 보자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국회의원들의 티베트 방문은 조금 애매해 보인다. 국제사회가 확인하고 있는 중국의 티베트 탄압을 ‘용인하는 듯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240년 전 건륭제의 청나라가 종교의 힘을 정치에 이용해 소수민족을 ‘제어’하려고 했다면, 역시 올해 70세를 맞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중국 공산당은 정치적 힘으로 종교를 찍어눌러 소수민족을 ‘말살’하려는 느낌이 강하다. 건륭제가 티베트의 전통을 존중해 현지를 본딴 사원을 만들고 판첸 라마를 ‘스승’으로 모셨다면, 지금 중국은 ‘환생’에 의해 전승되던 기존 관례를 무시하고 공산당원인 기알첸 노르부(確吉杰布)를 새 판첸 라마로 ‘임명’했다. 17일 티베트망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기알첸 노르부는 이날 중국의 티베트 침공을 기념하는 전람회를 돌아보고 중국의 정책이 티베트 내에서 잘 추진되고 있는 현장을 방문했다. 이같은상황의 티베트가 문화적 교류를 원활히 할 수 있고, 티베트 관련 포럼이 내부 이야기를 솔직히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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