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훈 논설위원

백발 산발의 노인은 인사를 마치자 몸을 돌려 무대 뒤편으로 더벅더벅 걸어갔다. 얇은 흰옷 하나 걸친 행색에 구부정해진 등이 애잔했다. 그제야 왕이 아닌 배우가 보였다. 저 걸음은 이제 마지막이겠구나. 눈시울이 시큰해지는데 노인이 돌아서서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기립했던 객석의 박수는 환호가 됐다. 지난 주말,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이순재의 리어왕’은 그렇게 종연했다. 더는 그 작품을 하지 않겠다고 하니, 왕의 커튼콜도 이젠 없다.

그가 연기한 리어왕은 위세와 탐욕, 오만이 가득한 원작의 권력자와는 결이 달랐다. 세 딸의 효심을 시험하던 중 가장 총애했던 막내딸이 언니들과 달리 “아무 할 말이 없다”고 하자 “할 말이 없다는 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다그쳤으나 권력자의 불호령이 아닌 그저 늙은 아버지의 진노로 전해졌다. 왕국을 나눠준 두 딸의 배신에 미쳐서 폭풍 속을 헤매는 왕은 이미 권력 무상을 넘어선 듯했다. 자신의 잘못을 파고들며 자학하는 왕, 셋째 딸까지 잃은 파국 앞에 “쥐 같은 것도 생명이 있는데, 너는 왜 숨이 없느냐”고 탄식하는 왕은 인간 본성에 관한 성찰이 끝나 있었다. 89세의 아버지, 이순재였다. 극의 파토스를 더하면서 비극의 서사가 장엄하게 느껴지도록 하는 대배우, 이순재였다.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대사의 세례 속에서 200분의 연극이 언제 끝났나 싶었다. 이순재는 “자다가도 대사가 튀어나올 수 있을 정도로 준비했다”고 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 이름을 줄줄이 외우는 암기력도 그렇거니와 중도에 막을 내린 적이 없는 건 그 연습 덕분일 게다. “나이가 많다는 것,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하다.”

극단은 이순재를 ‘최고령 리어왕’으로 기네스북 등재를 신청한다. 여태껏 최고령은 80세 정도란다. 그게 아니어도 그는 연기 인생 68년의 ‘최고 현역 배우’다. 연극이 끝나는 날 서울고 동창회가 90세를 앞둔 그에게 명아주 줄기를 말려 만든 지팡이, 청려장을 전달했다. 리어왕은 “우린 울면서 세상에 태어났지. 바보들만 득실거리는 이 거대한 무대에 떠밀려 나온 게 슬퍼서 울지”라고 하는데, 이순재는 그 무대를 떠날 생각이 없다. 이 여름에 드라마를 준비 중이다. 90세 전성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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