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인터뷰는 늘 긴 여운을 남깁니다. 한정된 지면의 사정상 다 싣지 못했던 작가의 말이 아쉬워 전합니다. 최근 첫 장편소설 ‘없는 층의 하이쎈스’(이하 ‘하이쎈스’)를 낸 김멜라 작가와의 인터뷰입니다.
최근 첫 장편소설 ‘없는 층의 하이쎈스’를 낸 김멜라 작가. 곽성호 기자
부모가 횡령 사건에 휘말리며 가족 모두가 흩어지게 된 상황, 아세로라는 부모를 떠나 할머니 사귀자의 ‘명필 교습소’에 머물게 된다. 허름한 남산빌리지 상가 건물의 ‘없는 층’ 2층. 할머니 사귀자는 온두라스 음식을 좋아하고 봉긋한 머리 볼륨을 유지한 채 늘 곱게 화장을 하지만 양 눈썹의 끝은 다소 비뚤다.
희귀 면역질환을 앓던 동생 칭퉁이를 잃은 후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에 괴로워하는 아세로라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던 중 교습소에서 발견된 ‘노란 종이’ 하나. 종이엔 ‘하이쎈스’라 불리던 간첩 사씨가 소시지 부침 등으로 하숙생들을 꾀어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하이쎈스는 할머니의 필명. 그날 이후 아세로라는 할머니를 간첩이라 믿고 사귀자의 행적을 살핀다.
‘하이쎈스’는 군사독재 시절 간첩으로 몰려 상가 건물에 숨어 살던 할머니 사귀자와 희귀병을 앓던 동생을 먼저 보낸 손녀 아세로라의 이야기. 이들은 ‘없는 층’에서 ‘없는 존재’로 살아간다.
최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멜라 작가는 "없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이 살아있는 나를 움직여 글을 쓰게 한다"고 말했다.
-첫 장편소설이다. 긴 호흡으로 써본 소감은
"최종본을 넘기고 만감이 교차한다는 게 딱 느껴졌어요. 단편 한 편, 한 편을 완성할 땐 그 느낌이 작게, 작게 들었다면 이번엔 볼륨이 크게, 파도처럼 밀려오더라고요. 이 인물들을 생각하면 먹먹함, 슬픔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절 무겁게 하는 게 아니라 고양시켜주는, 그런 감정이 들었습니다."
-‘없는 층’에 사는 할머니와 손녀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생각해낸 계기가 궁금한데
"서울 배경이고 남산 배경입니다. 평소 소외감을 느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 감춰진 것들에 대해 쓰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봄이 되면 남산에 꽃이 피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사진 찍고 좋아하지만 아세로라는 거기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감을 느끼면서 혼자 아픔을 간직하는 인물이잖아요. 사귀자는 남산타워를 보면서 아파하는 인물이고요. 다른 사람과 기억, 감정, 소외감을 공유할 수 없는 존재들이 없는 층에 함께 사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감춰진 것들에 대해 쓰고 싶었던 이유는 뭘까
"감춰진 것들이 보이는 것들을 떠받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사실 눈에 안 보이는 공기로 우리가 살고 있고요. 요즘엔 흙과 식물에 대한 것들을 많이 보는데 흙에는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엄청 많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하게 보이질 않아요. 세계의 조화가 다 연결돼있구나 싶습니다."
-주인공 이름이 독특하다. 아세로라와 사귀자. 주인공 이름을 지을 때 특히 많은 신경을 쓴다고
"네, 맞습니다. 아세로라는 꽃 이름이에요. 사람 자체는 화사하게 핀 꽃이라기보다 꽃을, 나를 꺾지 못하게 하는 힘을 갖고 싶어하는 인물이죠. 자기와 반대되는 이름을 지었어요. 또 받침이 없어서 부르기도 쉽고요. 사귀자는 처음 이름이 등장하는 게 신문인데요, 간첩으로 어떤 성씨가 등장하는 게 좋을까 하다 ‘사’가 좋겠다 싶었고, 받침도 없고 ‘사귀자’고 청유하는 느낌도 나서 택했습니다."
-할머니 ‘사귀자’의 캐릭터가 매력적이다. 항상 우아하게 행동하지만 눈썹은 비뚤어져 있고, 귀엽기도 하다. 캐릭터를 설정하며 가장 염두에 둔 부분은
"겉으론 우아하고 선을 지키고 싶어하지만 땀 나면 화장도 번지고 누가 건드리면 흠칫하고, 그런 부분을 과장되게 그렸는데 미워할 수 없는 면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아세로라는 미성년이잖아요. 청소년 시기의 에너지, 울분, 세상과 쉽게 타협하지 않는 강단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싶었습니다."
-외갓집이 남산이 보이는 곳에 자리한 하숙집이었다고. 그 때의 기억이 많이 반영됐나
"남산 밑에 있는 유스호스텔에 여러 번 묵었는데 그 곳이 중앙정보부 건물이었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나서 섬뜩했어요. 그 기억을 갖고 있다가 작년에 1년 반 정도 남산이 보이는 곳에서 작업을 했었고, 남산을 산책하면서 외갓집 기억도 떠올랐고요. 외갓집의 기억이라기보단 이 소설을 준비하며 찾아본 옛날 자료들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김멜라 작가가 문화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곽성호 기자
-굴곡지고 어두운 현대사를 일부 다루면서도, 유쾌하게 읽힌 점이 좋았다.
"그 고민을 계속 했어요. 분명히 쉬운 얘기나 가벼운 얘기가 아닌데 너무 가볍게 다가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요. 사실 사귀자는 그 핵심 인물도 아니고 얼토당토않게 휘말린 사람이잖아요. 그것을 사실적으로 무겁게 그리기보다 전혀 이런 상황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도 마음과 귀를 열 수 있는, 그 정도의 볼륨으로 다가갔으면 했어요. 워낙 무거운 이야기에 진지한 소재들이기에 접근하는 거라도 조금 편안하게 받아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사귀자의 사연에 가슴 아프면서도 웃음이 났다. ‘웃음의 힘’을 믿나.
"그럼요. 웃음을 좋아해요. 제 자신이 가라앉은 편이라, 밝고 가볍고 유머러스한 사람이나 존재를 좋아해요. 작품도 그런 작품을 좋아하고요. 쉽고 익숙한 길은 진지하고 톤이 무거운 쪽인데 한 바퀴 돌아 완전 반대편으로 가서 덜 어둡고 덜 무겁게 하려 해요."
-딜도를 화자로 한 ‘저녁놀’, 죽음을 유쾌하게 그린 ‘제 꿈 꾸세요’ 등 이전 소설들에 비해 뭔가 한층 더 넓어졌다는 느낌이다
"넓어지면 좋죠.(웃음) 이번에 시대나 역사를 담아야겠다고 직접적으로 생각한 건 아닌데요. 그 당시를 기록한 책들을 몇 번이나 읽었는데, 쭉 한 번에 읽기는 힘들었지만요. 어쨌든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을까’ 싶었고, 조금이라도 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남산’ 하면 그런 일도 있었다라는 걸 조금이나마 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꾸준히 작품들을 발표해오고 있다. 글을 쓰는 동력이 뭔가
"없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이요. 그들이 살아있는 저를 움직여 글을 쓰게 합니다. 기미가 느껴지는데 말할 수 없는 존재, 그런 것을 내보이게 해주는 게 소설이 아닐까 생각해요."
-퀴어 소설로 주목받았다. 없다고 여겨지는 존재들 중 그들도 있을까.
"네. 성소수자들, 쉽게 눈에 보거나 마주할 수 없는 사람들. 의도하고 그런 존재를 쓰는 건 아닌데 뭔가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면 그런 존재에 마음이 많이 끌리는구나, 깨달아요."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나. 어떤 작가가 되고 싶나.
"점진적인 활동이랄까요. 점을 찍고 또 한 점을 찍고. 다윈이 말한 진화도 눈앞에 보이는 성과와 이익에 따라 점을 찍고 또 찍은 게 수억 년간 이어져 오면서 미생물에서 양서류, 파충류, 인간이 된 거라고 해요. 저도 눈 앞의 점만 찍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너무 멀리 계획하지 말고. 그렇게 한 점 한 점 찍다 보면 선도 되고 면도 되지 않을까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