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지난 7일 오후 10시 30분쯤 김포공항에 도착했지만 두 시간이 지나서야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일본 후쿠시마(福島) 오염처리수 방류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시위에 발이 묶인 탓이다. 시위대는 “해양 투기 반대” “그로시 고 홈”을 외치며 격렬하게 항의를 표시했다. 한국을 찾은 주요 외교사절이 입국 길에서부터 곤욕을 치른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틀 뒤인 지난 9일에도 그로시 사무총장은 국회를 찾았다가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빠져나왔다. 친민주당 성향의 유튜버와 권리당원들은 국회 본청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실 밖에서 그로시 사무총장과 민주당의 면담이 진행되는 동안 시위를 벌였다.

그로시 사무총장은 국내 언론 인터뷰에서 “여기(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일에 훨씬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후쿠시마보다는 북핵 문제를 더 걱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언급은 북핵과 같은 실존적 위협 요인은 가볍게 생각하고 후쿠시마 오염처리수에 대한 과학적 검증은 신뢰하지 않는 한국 야권의 ‘이중적 행태’에 대한 ‘심중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트위터에 야당 인사들과 면담한 사진과 함께 “IAEA는 한국인들의 우려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글을 올린 뒤 출국했다. 그는 2박 3일 내내 자신을 따라다닌 시위대에 대해 “민주적 사회에서 당연히 존재할 수 있는 의견”이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직업 외교관 출신답게 그의 발언은 절제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원칙적으로 집회·시위가 금지된 국회 경내에서까지 격렬한 항의에 나서고 IAEA의 과학적 검증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듯한 한국인들의 행보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건설적인 토론 없이 후쿠시마 오염처리수 방류 문제를 덮어놓고 불신하는 식의 한국 정치는 후쿠시마 오염처리수의 안전성을 확보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만큼 정치의 수준도 성장하길 기대한다.

김유진 정치부 기자 klug@munhwa.com

관련기사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