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부부 10년간 귀농 준비
농사지으며 행복해했는데…”
“집안으로 토사·돌덩이 쏟아져
귀농 싫다던 아내만 매몰돼”
경북 북부 피해 27명 중 20명이 귀농인
예천·봉화=전수한·박천학 기자
“이제야 귀농의 꿈을 이뤘다고 매일매일 행복해하던 부부인데,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경북 봉화군 학산리에서 농장을 하는 하모(55)·김모(53) 씨 부부는 지난 13일부터 쏟아진 폭우로 한날한시에 세상을 떴다. 아침엔 내내 블루베리를 따고, 밤새 포장을 하다가 곤히 잠든 15일 새벽, 안방에 토사물이 들이닥쳤다. 물과 흙, 나무와 폐타이어 등이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사고 발생 시각은 오전 2시 전후로 추정되는데, 오전 3시나 돼서야 산사태 ‘주의보’는 ‘경보’로 격상됐다. 지난 16일 오후 장례식장에서 만난 김 씨의 친오빠는 “블루베리가 수확철이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면서도 행복해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하 씨 부부는 오랜 꿈이던 귀농을 위해 10년도 넘는 시간을 준비했다고 한다. 본가인 대구와 봉화군을 오가며 농장을 가꾸다가, 10년 전쯤 하 씨는 아예 농장 근처에 집을 짓고 학산리로 이사했다.
이들 부부는 동네 주민들이 농사일을 도와주려 할 땐 한사코 거절하면서도, 수확철이 되면 인심 좋게 동네방네 사과를 나눠주러 다녔다고 한다. 하 씨는 사고 하루 전인 14일 자신의 블로그에 “장맛비가 그치지 않는다. 그냥 조용조용 오는 게 아니라 쏟아붓듯이 온다. 다음 주도 계속 비소식이 있는데 걱정이다”라고 글을 남기기도 했다.
지난 13일부터 경북 북부지역에 내린 집중호우로 사망하거나 실종된 주민 상당수가 귀농해서 농사를 지으며 노후를 알차게 보내려던 꿈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수해를 당한 것으로 드러나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경북도에 따르면 17일 오전 10시 기준 경북 북부지역의 피해자 27명(19명 사망·8명 실종) 중 20명이 귀농인이다.
16일 오후 경북 예천군 예천농협장례식장에서 빈소에서 신모(69) 씨는 아들과 함께 아내(69) 영정사진을 멍하니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신 씨는 지난 2016년 홀로 예천군 효자면 백석리로 귀농했다. 1만3000여㎡의 땅에 사과농사를 지으며 홀로 지내던 중 “시골살이가 싫다”며 절대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아내가 뒤따라 정착했다. 그는 “비가 오는 날이면 아내와 함께 사과나무에 농약을 치곤 했는데…”라며 울먹였다.
예천군 용문면 사부2리에서 홍수로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숨진 전모(69) 씨 부부는 귀농한 지 1주일밖에 되지 않았다. 이 부부의 한 친척은 “이들 부부는 서울 직장에서 퇴직한 뒤 이곳에 와 가옥을 리모델링하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 준비하던 중 변을 당했다”고 전했다.
아직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고 실종자 구조 소식를 기다리는 가족들도 있다. 17일 오전 벌방리 노인회관에서 만난 지난해 귀농한 실종자 윤모(62) 씨의 동서 김모(58) 씨는 “15일 새벽 ‘우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집에 흙과 나무가 떠내려왔다”면서 “나와 내 남편, 형님의 남편은 빠져나왔는데 잠깐 집 안쪽을 살펴보러 가신 우리 형님은 못 나오셨다. 형님 걱정에 며칠 동안 잠도 한숨 못 자고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간다. 기적처럼 돌아오셨으면 좋겠다”며 덜덜 떨었다.
구조 당국은 15일부터 사흘째 수색 작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토사물이 곳곳에 쌓여 있고 수색 범위가 넓은 탓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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