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식카페 - 기술이 지나간 자리 - <27> 신용카드가 오돌토돌했던 시절
금융전산망 없던 시절
결제 정보 손으로 쓰다가
실수잦고 번거로워 먹지 각인
포스 단말기 나오면서
종이 전표·요철 필요없게 돼
카드번호·이름은 IC칩 저장
매끈해진 플라스틱 카드에
시각장애인들은 ‘곤혹’
모서리 작은 홈 만들기도



신용카드를 새로 만들 때 고려하게 되는 요소는 어떤 것들일까? 연회비나 혜택 같은 실용적인 요소도 중요하겠지만, 디자인도 중요한 요소다. 신용카드 회사마다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디자인의 카드를 만드는 데 공을 많이 들이고 있다.
요즘 카드 디자인의 대세는 카드 번호와 사용자 이름을 카드 앞면에서 뒷면으로 옮기고 앞면은 마치 화폭처럼 사각형 전체를 디자인을 위한 공간으로 쓰는 것이다. 카드 번호와 사용자 이름을 앞면에 볼록 튀어나오게 엠보싱한 카드는 이제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옛날에는 왜 신용카드에 요철을 만들었던 것일까? 그리고 왜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된 것일까?
◇눌러서 전표에 각인했던 옛날 신용카드
최초의 ‘범용 신용카드’, 즉 하나의 카드로 다른 여러 가게에서 결제할 수 있는 신용카드 사업을 시작한 기업은 1950년 설립된 다이너스클럽(Diners Club)이다. 이후 아메리칸익스프레스나 마스터카드 등의 기업이 잇달아 경쟁에 뛰어들면서 신용카드 시장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한국에서도 1959년 다이너스클럽이 신용카드의 사업 가능성을 타진했고, 1965년부터 미국 관광객들이 국내에서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카드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신용카드가 차츰 알려졌다.
신용카드가 처음 발명됐을 때에는 금융전산망 같은 것이 없었다. 가맹점에서는 상품을 팔 때 고객의 카드 번호와 이름, 구매 금액 등의 결제 정보를 손으로 적어 넣어 전표를 작성했다. 이 전표를 신용카드 회사에 우편 등으로 전달하면 신용카드 회사가 가맹점에 대금을 지급하고, 나중에 신용카드 회사가 고객에게 대금을 청구하는 식으로 거래가 완성됐다. 구매 시점과 대금 결제 시점이 달라질 수밖에 없으므로 거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고객의 지불 능력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신용’ 카드라는 이름도 그래서 붙은 것이다.
삼자 사이의 거래이므로 전표도 3장이 필요했다. 고객과 가맹점, 신용카드 회사가 한 장씩 나눠 갖고 거래의 증표로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같은 전표를 3장씩 쓰는 것은 번거로울 뿐 아니라 실수할 가능성도 내포하는 일이었으니, 전표를 한 번 쓸 때 3장씩 복제되도록 한다면 편리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이 연재에서 앞서 소개한 적 있는 먹지(carbon paper)였다. 잉크를 먹인 전표를 3장 겹쳐서 한 세트로 만들면, 맨 위 또는 맨 아래에 한 번만 결제 정보를 쓰면 3장의 전표를 똑같이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먹지는 압력에 반응하는 재료이므로, 카드 표면에 카드 번호와 카드 소유자의 이름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으면 3장짜리 전표를 카드 위에 올리고 문지르기만 해도 손쉽게 전표를 채울 수 있다. 이것이 옛날 신용카드가 카드 번호와 소유자 이름을 요철로 새기게 된 까닭이다.
그런데 대부분 기술이 그렇듯, 이 아이디어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신용카드의 뿌리를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선불권 또는 선불카드까지 이어진다. 신용을 담보 삼아 구매 대금을 나중에 결제하는 것보다는 미리 돈을 내 두고 구매할 때마다 차감하는 것이 판매자 입장에서 훨씬 위험이 적었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선불권에는 여러 형태가 있었는데, 휴대하기 편하도록 동전 형태로 만든 것도 많이 이용됐다. 그리고 동전 모양의 선불권에 고객의 이름을 새겨 두면, 사용 금액을 차감할 때 동전 위에 전표를 덮고 슥슥 문질러서 해당 고객의 정보를 바로 종이에 옮길 수 있었으므로 장부 정리하기가 편했다.
이렇게 구매자에 대한 정보를 물체에 각인해 전사(轉寫)하는 기술은 선불권이 동전에서 네모난 카드 형태로 바뀌고, 선불카드가 후불 신용카드로 바뀌어도 살아남았던 이유다.
신용카드가 널리 쓰이자 먹지 전표를 문지르는 일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신용카드 각인기(credit card imprinter)라는 전용 기계도 제작됐다. 이 기계는 레버를 누르거나 슬라이드를 밀면 고무 롤러가 전표 위를 문질러 줘 먹지에 글씨가 배어 나오도록 만든 것인데, 미국에서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졌다. 롤러가 왕복할 때 끽끽거리는 소리가 나서 ‘집잽 머신(ZipZap machine)’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자주 사용하다 보면 손가락과 손목 등의 관절이 아프기 때문에 ‘손가락 관절 파괴자(knuckle buster)’라고도 불렸다.

◇카드 그 자체보다 정보가 중요한 시대
그런데 요즘에는 카드의 요철도, 그 요철을 이용해 전표를 찍는 각인기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왜 이들 기술은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일까?
각인기가 필요 없어진 것은 종이 전표가 필요 없게 됐기 때문이고, 그것은 종이 전표 없이도 거래의 건전성을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쉽게 주고받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정보통신기술(ICT)이 발전하면서 전화선 또는 광케이블과 같은 데이터 전용선을 통해 여러 가지 정보를 2진수로 변환해 실시간으로 주고받을 수 있게 됐다. 가맹점은 종이 전표를 카드 회사에 우송하는 대신 전화기의 키패드를 이용해 전표에 적힌 정보를 보내줄 수 있게 됐다. 흔히 ‘포스기’라고 부르는 포스(POS: Point of Sale) 단말기, 또는 지불 단말기(payment terminal)가 보급되면서는 전화기 키패드로 숫자를 누를 필요도 없어졌다. 카드 번호와 사용자 이름 등의 정보는 신용카드의 까만 자성체 띠와 IC칩에 2진수로 저장됐다. 이 정보를 기계로 읽어 들이고 거래 금액을 입력하면, 이 디지털 전표는 더 이상 인간의 눈이나 손을 거치지 않고도 바로 카드회사로 전송되고, 카드회사는 거래의 건전성을 실시간으로 판정해 거래를 승인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신용카드의 물질적 특성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된 것이다. 카드를 직사각형으로 만들 필요도, 카드 번호 따위를 표면에 새길 필요도 없다. 이제는 심지어 IC칩 같은 최소한의 물질적 기반이 없어도 상관없다. 점점 많은 사람이 스마트폰이나 스마트워치 안에 앱(app) 형태로 신용카드를 담아두고 있으며, 지갑을 들고 다닐 필요도 없이 이들 전자 장비를 이용해 편리하게 각종 거래를 하고 있다. 과거의 신용카드가 플라스틱에 카드 번호 등을 새겨 정보에 물성(物性)을 부여한 것이었다면, 현재와 미래의 신용카드는 그 물성의 제약을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벗어나려 하고 있다.
◇그래도 물성을 지닌 정보가 필요할 때
하지만 모든 이가 이런 변화를 반기는 것만은 아니다. 신용카드가 요철을 버리고 얇고 매끈하게 바뀌어 가자 시각장애인들은 곤혹스러워했다. 만지는 것만으로는 어느 것이 어느 카드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김태호 전북대 교수
■ 용어설명 - 비접촉 결제(contactless payment)
신용카드 다음 단계의 결제 방식으로 활발히 개발되고 있는 기술이다. 무선통신 칩에 내장된 정보를 가까운 단말기와 주고받음으로써 금융 거래를 일으킬 수 있다.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보안 기술이 경쟁해 왔기 때문에 통일된 규격을 만드는 데 어려움이 있지만 현재 유로페이·마스터카드·비자가 연합하여 제정한 EMV 방식이 사실상 국제 표준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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