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언 미술평론가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는 세계 내 존재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끈으로 얽혀 있다. 굳이 불가의 교리가 아니어도, 우리의 지나간 삶을 회고하고 통찰할 때마다 느끼곤 한다. 업보(業報)라는 것도 그 끈을 따라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이치에 따른 역지사지(易地思之), 이는 최고의 깨달음과 지혜의 첫걸음이다.
서정민 작가는 믿기 어려운 퍼포먼스로 우리 연(緣)의 세계를 실제 물성으로 보여준다. 폭이 한 치 조금 못 미치는 종이띠를 동심원처럼 감아 나가면서 판을 만든다. 2m 정도의 지름으로 감았을 때, 그 띠의 길이는 그저 무한대에 가깝다. 우리가 가진 연의 길이와 윤회의 사이클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과 노동력을 바쳐 이룬 구조는 하나의 판형 평면이 된다. 각고의 물리적 수행과는 대조적으로, 그 판 위에 펼쳐지는 조형의 몸짓은 의외로 허무의 흔적으로만 남는다.
조각도 가는 대로 반복하는 침묵의 새김질은 결 따위의 패턴을 이루기도 한다. 하지만 방점은 여전히 무위의 몸짓에 있다. 묵언(默言)이 웅변 이상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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