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워인터뷰 - 지한파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생기는 기틀이 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李 노력 있었다는 점은 분명
독립운동했던 사람이기도 해
남북 대립, 해결 어려운 상황
무리한 통일추진땐 위험해져
평화적으로 대립하는게 중요
北은 전쟁서 태어난 사회주의
‘자주국방’주장 근거가 핵무기
인터뷰 = 김석 국제부장
“지금의 한국은 이승만이라는 사람의 끈기가 만들어낸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내 대표적 지한파로 한국과 북한 현대사를 연구해온 와다 하루키(和田春樹·85) 도쿄(東京)대 명예교수는 지난 7월 31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이승만의 업적을 제로(0)라거나 해악만 끼쳤다고 보는 건 비역사적 평가”라며 이같이 말했다. 한국전쟁 연구를 집대성한 ‘한국전쟁 전사’ 한국어판 출간 기념으로 방한한 와다 교수는 “이승만은 반공주의자였지만, 통일에 대해서도 적극적이었던 일종의 민족주의자적인 성향이 강한 인물”이라며 “한반도 통일을 위해 노력한 그의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와다 교수는 이번 저서에서 한국전쟁 발발 배경부터 1953년 7월 정전협정까지의 과정을 방대한 자료에 근거해 이념적 치우침 없이 서술해냈다. 그는 이번 저서에서 미국 정부 문서 등을 바탕으로 한국전쟁 발발 전 미군 철수 때 이 전 대통령의 무기 확보 노력, 정전 카드를 활용한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 등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부정해오던 미국 국방부가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로 방향을 바꾼 배경을 ‘이승만의 끈기였다’고 평가했는데 이러한 평가를 내리신 이유가 궁금하다.
“한국은 과거 민주화 과정에서 민중들의 노력이 있었다. 1960년에 학생혁명(4·19 혁명)과 같이 이승만을 쫓아내려는 시도가 있었던 건 분명하다. 그다음으로 박정희 정권과 군부 정권을 끝내려고 했던 1980년대의 민주화 혁명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점을 강조해서 이승만의 업적을 제로(0)로 보거나 해악만 끼친 사람으로만 보는 건 비역사적인 평가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생기는 데 기틀이 된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있어서 이승만이라는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국이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나라를 세우려 했을 때 이승만이라는 사람의 끈기가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승만은 반공주의자였지만, 통일에 대해서도 적극적이었던 일종의 민족주의자적인 성향이 강한 인물이다. 나는 한 인간에 대해 일면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에서 이승만은 마지막까지 정전을 반대했다. 통일될 때까지 계속 전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통일에 대해서도 강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이라는 국가는 그런 상황 속에서 이승만이라는 사람이 만들어낸 성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전협정에서 한국이 빠진 이유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오해가 있다. 이승만이 정전협정에 반대해서 협조하지 않았다는 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정전협정은 유엔군과 북한 쪽 중국 인민군, 조선 인민군이 전쟁에 대해서 정전 회담을 한 것이다. 당시 한국은 유엔군에 포함되어 있었으니, 한국은 따로 정전협정에 서명할 필요가 없었던 상황이다. 문제는 한국 정부가 이를 인정하느냐의 문제인데 이승만은 정전협정을 계속해서 인정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계속해서 반대했고, 내가 책에 썼듯이 미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을 제거할 생각까지 했었다. 마지막 순간에 이승만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맺는다면 정전을 인정하겠다고 했다. 북한 공산당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북한과 중국도 중·조 연합 사령부를 만들어 중국 인민군 쪽 사령관인 펑더화이(彭德懷)가 공산당 군대 전체를 총괄했다. 중국 펑더화이와 미국의 연합사령관이 조약을 맺으면 정전이 되는 상황인데, 중국 인민군과 조선 인민군이 중·조 연합사령부 설립 사실을 비공개로 했다. 그래서 3자가 협상을 맺는 구도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북한은 평화 협정 등의 논의가 나오면 “한국은 빠져라. 우리는 당사국인 미국과 이야기를 하겠다”는 주장을 편다.
“난센스다. 한국전쟁은 한국과 북한이 서로 존재를 부정하고 통일하려 한 전쟁이다. 그게 기본이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한국은 정전협정에 서명을 안 했으니까, 평화협정에 대해서도 대화하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하나의 교섭술이다. 당사국인 한국이 안 들어가면 의미가 없지 않으냐. 그런 식의 북한 주장은 의미가 없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해 한국 진보와 보수에서는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이번 책을 저술하실 때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바뀌셨는지 궁금하다.
“일본인의 시각에서 보면 이승만은 한국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자 조선 민족주의 운동을 했던 사람이다.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 운동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했던 독립운동에 대해 한국 내부의 평가가 엇갈리는 경향이 있다.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을 잠시만 했으니 독립운동을 짧게 했다’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에 기대서 일했다’ 등의 평가가 있지만, 일본 입장에서 보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운동해온 민족주의자다. 그 점에서 우리는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이승만에 대한 나의 입장이 바뀌었느냐 물었는데, 회상해보면 바뀌지 않았다. 한국전쟁에 대한 책을 서술한 입장에서 보면 이승만이 이 정도로 통일을 바랐다는 점에 감명받았다. 그의 이념이 공산주의건 민주주의건, 한반도가 통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노력한 것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한다.”
―한반도는 책에 쓰신 ‘특별한 적대적인 상태’가 여전히 계속되는 모습이다. 이러한 적대적 상태 해소가 가능할까.
“결국 한반도에서는 일본 제국주의가 무너진 뒤 한국과 북한이라는,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두 개의 국가가 태어나 버렸다. 한국민에게는 물론 아무런 책임이 없지만, 이처럼 나라가 분단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체제를 해소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한국전쟁 정전 이후 무력 통일은 실패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 뒤에 양국이 무력통일을 포기했다는 건 명확하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느냐는 건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양국은 대립하는 사이에도 진정한 공존의 길을 모색하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그건 어려운 일이다. 미안하지만, 남북 대립이라는 건 해결이 어려운 상황이다. 무리하게 통일하려고 한다면 굉장히 위험한 대립 관계가 돼 버릴 가능성이 높다. 평화적 대립 상태 유지는 물론이고, 통일의 길을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십자가의 길이다.”
“일본, 과거사 반성 철저하게 하고 한국, 파트너 인정해 미래 협력을”
위안부합의 무산 등 한일 대립속
尹 강제징용 제3자 변제안 마련
양국 관계 개선 의지 높이 평가
日 젊은세대, K-팝 등에 호의적
공존 분위기 발전 방안 고민해야
중·러, 北에 절대적 영향력 없어
일본은 북한과 경제 협력 원해
韓, 국교 정상화 지원 등 나서길
―남북 간 분단 기간이 길어지면서 사이도 멀어지는 분위기다.
“남북 간 서로 갈라졌던 기간이 길었다. 서로 국력 차이도 커지고 있다. 이승만, 박정희 시대에 한국은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민주주의 혁명에 성공했고 이를 실현했다. 한국은 혁명을 계속해왔던 나라인 데 반해 북한은 혁명을 하지 않은 나라다. 한국은 혁명을 통해서 발전해온 나라이고 경제와 체제도 갈수록 성숙하고 있다. 이에 북한은 한국에 흡수될 거라는 불안감을 점점 더 크게 갖게 됐다. 북한은 ‘전쟁에서 태어난 사회주의’다. 체제 유지를 위해서 대외적인 긴장은 북한에 필요하다. 그래서 한국과 대립하는 게 북한 체제의 전제가 되어있다. 민주주의를 통해 경제가 발전하는 한국을 북한은 ‘미국의 속국’이라고 비난한다. ‘한국은 미국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우리는 자주 국방을 하고 있다’고 북한이 주장하는 근거가 핵무기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북한은 대립을 이어가니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다. 여기에는 한국과 역사적 관계를 이어온 일본이라는 나라가 있다. 북한 입장에선 일본도 미국의 속국이다. 현재 일본은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고 북한에 대해서 경제 협력을 하고 싶어한다. 지금 국제정세를 봤을 때, 한국이 북한 문제에 일본을 끌고 와 남·북·일 협력을 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여기서 한국은 일본을 지지해서 북한과 일본이 국교 정상화하고 협력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남북 관계를 남·북·일 3국 관계로 바꾸고, 적대적 대립 상태를 해소하는 게 과제라고 생각한다.”
―정전 70주년 기념일(7월 27일)을 맞아 북·중·러 대 한·미·일이라는 대립 구도가 더욱 뚜렷해지고 있는데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한국전쟁과 정전은 미국과 소련 간 대립 체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1990년대 초에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했고 냉전이 끝나면서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 2000년대에 미국에 대한 이슬람의 테러리즘이라는 도전이 발생하자 미국과 중국·러시아가 협력했고, 북한은 핵을 가지고 이런 국제 정세에 대해 대항하려 했다. 이슬람 테러리즘의 시대가 끝나고 이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끝났다고 생각했던 전제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이 부활했다. 미국은 전면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북한은 러시아를 지지하는 소수의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중국은 암묵적으로 러시아 편에 섰고,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에 대한 대응은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됐다. 러시아와 협력하는 중국의 힘을 약화시키는 게 전쟁을 대하는 미국의 태도가 되었다. 현재 상황에선 미국이 견제하는 전제주의 국가가 러시아·북한·중국이다. 한·미·일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연합을 구축했다. 냉전으로 다시 회귀했다는 생각이 든다.”
―북핵 문제 해결에 있어서 러시아와 중국은 어떤 입장을 취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북한이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러시아와 중국이 뒤에서 원조하기 때문이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지만, 그런 것 같진 않다. 러시아 자체가 당장 굉장히 큰 내부 문제에 얽혀있고, 그게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그 전쟁을 간단히 끝낼 수 없는 상황에 와있다. 러시아가 북한에 대해 큰 영향을 미치는 건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북한은 러시아와 중국으로부터 원조는 받지만, 큰 원조를 받거나 순응하려는 자세를 보이는 것에 대한 경계감이 있다. 중국에 대해서도 북한은 미묘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북한은 자신이 중국·러시아로부터 떨어져 자립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양국이 북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쳐서 북한을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 한·일 관계를 어떻게 보나.
“한·일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같은 입장에 서 있다. 일본은 미국 도움으로 헌법 개정을 이뤘고, 한국은 미군이 주둔하며 지켜주고 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극단적으로 국내 대립이 심화하는 등 위험한 상황이다. 그런 만큼 한국과 일본은 본인들의 국익을 위해서 협력해야 한다. 물론 한국 내에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 관련해 ‘일본은 아무 사죄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 일본에 나 같은 지식인들도 ‘일본이 제대로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것이 결국 1990년 무라야마(村山) 담화·고노(河野) 담화로 이어진 거고, 1998년 김대중-오부치(小淵) 파트너십 선언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협력하기 위해서는 일본이 식민지 시대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성하는 게 꼭 필요했다고 본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담화나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한 위안부 문제 해결 노력이 불충분하다는 지적도 있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이런 상황 속에서 양국 간 대립이 너무 심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체결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무산시키지 않았나. 물론 나도 그 기분은 알지만, 일본과 한국은 과거를 반성하고 협력해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가 해결이 안 된 상황에서도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선언까지 가지 않았나. 서로 성과를 인정하고 한국 국민 역시 일본과 협력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강제징용 제3자 변제 등 한·일 관계 정상화 정책은 어떻게 평가하나.
“한국 측의 지적대로 일본이 충분히 반성하지 않은 측면이 있지만, 윤석열 정권 출범과 함께 한·일 양국에서 협력하고 싶다는 여론이 대두된 것 같다. 윤 대통령은 일본을 비난하는 건 그만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외교를 해나가는 것 같은데, 이런 국면까지 끌고 온 것을 칭찬하고 싶다. 일본 정부가 이런 윤 대통령을 도와주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전혀 도와주지 않고 있다. 그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윤 대통령이 일본과의 관계를 좋게 만들겠다고 하는 건 양국 모두에 지지 여론이 있기 때문이다. 개선하겠다는 그런 마음도 좋지만, 한국과 일본이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방향도 중요하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5월 방한 당시 강제징용 문제를 개인적으로 사과하면서 한국 내부에서는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에 일본 정부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가 2015년에 위안부 합의를 맺었을 때, 아베 전 총리는 ‘이걸로 사죄는 마지막’이라고 했었다. 기시다 총리는 당시 아베 내각 외무상이었고 직접 위안부 합의를 이끌어냈다. 한국에서는 이를 납득하지 못한다는 여론이 많았고, 기시다 총리는 이에 대해 굉장히 반발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사과를 했는데, 그게 안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해 기시다 총리와 아베 전 총리는 굉장히 화를 냈다. 아베 전 총리가 화낸 건,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가 그런 식으로 말한 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총리가 됐을 때 위안부 재단 관련 조치를 취해야 했다. 인간이라면 자신이 위안부에게 사죄한 것에 대해서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는 게 맞는데, 합의가 파기됐다고 화를 냈다. 이 때문에 기시다 총리가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일본 내에서 나오는 거다. 그래서 난 기시다 총리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상황을 지금 바꾸는 건 잘되지는 않을 것 같다. 문재인 정권 들어서면서 위안부 합의가 무산되는 상황이 되자 당시 외무성 내에서는 ‘한국은 대체 뭐냐’라며 화를 내는 여론이 많았다. 이에 아베 전 총리는 2019년 한국과는 관계를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시켜 버리면서 본인의 생각을 대외적으로 드러냈다. 당시 아베 전 총리는 ‘한국을 외교적으로 상대하면 안 된다’고까지 생각했다. 이후 아베 전 총리는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을 통해 대만, 필리핀과 협력해서 중국에 대응한다면서도 한반도는 외교 상대에서 제외한다는 구상을 했다. 실제 아베 전 총리는 2019년 한 일본 주간지 인터뷰에서도 ‘한국은 외교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계속 이야기를 했었다. 아베 전 총리는 죽기 직전까지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도 자민당 내 수뇌부 중 일부는 ‘한국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다면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일 관계는 끝없이 대화하면서 생각하는 방식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향후 한·일 관계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보는지.
“솔직히 말해서 한·일 관계와 관련해 일본의 현재 여론은 그렇게 밝진 않다. 하지만 일본의 젊은 세대는 한국에 호의를 가지고 문화나 음악을 즐기며, K-팝 같은 것들도 굉장히 즐겨 듣고 있다. 나는 이런 현상이 양국 간에 문제 많은 역사 속에서도 서로 공존하는 분위기를 만든다는 점에서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과연 역사적으로 발전하며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또 향후 한·일 관계는 북한과의 관계와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큰 걱정거리는 북한이다. 북한이 핵실험 등 군사적 행보를 하는 건 굉장히 걱정되는 문제다. 동해를 ‘군사의 바다’로 만들 순 없기에 북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동북아 전체를 어떻게 만들지를 일본에 전달하고, 그걸 좀 더 고민하고 공유할 필요가 있다. 일본 입장에서 한국이 생각하는 방식을 잘 이해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공유하는 것, 그리고 북한과 어떻게 연결해야 할까가 과제다. 시민운동이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일본 시민운동이 고령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일본의 젊은 세대가 한국과의 관계를 고민하고 만들어 나가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일본의 젊은 사람들이 한국인들과 더 가까워지고 시민사회가 새로운 협력방안을 고민하게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50년전 김대중 납치사건 계기로 韓연구 시작 과거사 해결 앞장서온 日학계‘살아있는 양심’
■ 와다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정전’이라고 적힌 배지를 늘 차고 다닙니다.”
일본 학계의 ‘살아있는 양심’이라고 불리는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東京)대 명예교수가 지난 7월 31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본인의 왼쪽 가슴에 찬 배지를 가리키며 한 말이다. 그는 한·일 관계를 연구해온 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일본의 ‘평화주의’를 상징해온 지식인이다.
와다 교수는 당초 전공은 러시아 근대사였지만 1980년대부터 북한 연구로 이름을 날렸다.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한국 연구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와다 교수는 단순한 한국·북한 연구를 넘어 일제 식민지배와 화해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앞장서왔다.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아시아여성기금 발기인, 운영심의회 위원, 이사, 전무이사,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또 지난 2010년 ‘한국병합 100년에 즈음한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의 일본 측 대표를 맡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한·일 관계 개선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제4회 후광 김대중 학술상을 수상했고, 2012년에는 DMZ평화상, 2019년엔 만해상을 수상했다. 2016년부터는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 이사 및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1992), ‘한국전쟁’(1999), ‘북조선’(2002), ‘한일 100년사’(2015), ‘북한 현대사’(2014),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2016), ‘아베 수상은 납치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2018) 등이 있다.
△1938년 일본 오사카(大阪) 출생 △도쿄대 문학부 서양사학과 졸업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소장 △도호쿠(東北)대 아시아 연구센터 객원 교수 △아시아여성기금 발기인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 이사
한국戰 ‘동북아 전쟁’ 규정… 발발부터 정전까지 방대한 사료 제시
■ 와다 교수 ‘한국전쟁 전사’는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東京)대 명예교수가 한국전쟁 정전 기념일 70주년(7월 27일)을 맞아 내놓은 ‘한국전쟁 전사’ 한국어판은 교수 스스로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마지막 책”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방대한 자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와다 교수는 ‘전사(全史)’라는 제목이 무색하지 않게 한국전쟁의 발발 전부터 1953년 7월 정전협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남북한은 물론 미국과 중국, 소련, 일본 등의 사료에 근거해 써내려갔다.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까지의 원인과 상황, 한국전쟁이 남북한과 미국, 소련, 중국, 일본, 대만에 주는 의미, 한국전쟁이 이후 동북아와 세계 질서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는 데 방점을 뒀다. 또 김일성이 스탈린을 집요하게 설득해 남침 승인을 받아내는 상황,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는 과정, 정전협정을 둘러싼 북한과 중국·소련 간 갈등, 소련과 북한이 실패로 끝난 한국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내부에 적을 만들어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 등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정리 = 김선영 기자 sun2@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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