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립습니다 - 김세종 선생님(1938∼2017)

3층 호스피스 병동 앞이다. 나도 몰래 긴 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마음이 납덩이처럼 가라앉는 건 어쩔 수 없다.

병실의 환자는 잠자는 듯 누워 있다. 얼굴이 얼마나 창백한지 밀랍으로 만든 조각 같다. 그래도 오뚝한 콧날과 시원한 이마는 여전하다. 젊은 시절에는 꽤 수려했을 얼굴을 보니 그 옛날이 떠오른다.

시골 중학교에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그분은 부임하자마자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에는 사진 찍는 것이 유일한 호사였는데, 여학생들 흑백사진의 한가운데를 독차지했다. 젊고 유머 감각이 있는 데다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가 남다른 분이라서 그랬나 보다. 반 아이끼리 토의하는 학급회의 시간이면 여자애들은 꿀 먹은 벙어리 같았는데, 여자도 자기표현에 익숙해야 적극적인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셨다. 사소한 발언에도 고개를 끄덕여주는 선생님 덕에 숫기 없는 애들도 차츰 발표하는 용기를 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얼마 되지 않아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거기서도 잘할 수 있을 거다. 너를 믿는다.’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전교생이랬자 남녀 합하여 이백 명도 안 되던 시골 중학교 출신은 기가 죽어 있던 참이었다. 한눈에도 촌놈 티가 났으리라. 어리숙한 제자의 사기를 북돋워 주기 위해 다소 과장하신 걸 모르는 바가 아니면서도 스승의 편지는 힘이 되었다. 그것은 기신기신하던 내 여고 시절에 강력한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벌써 사십여 년 전의 일이다.

병상 옆에는 휠체어와 환자용 소모품들이 차지하고 있다. 더운 여름날에도 남학생들과 공을 차며 쨍하게 웃으시던 분은 어디에도 없다. 겨울이면 아이들을 운동장에 풀어놓고 눈싸움을 즐기시던 선생님, 벌떼같이 몰려드는 남자애들을 상대로 눈 뭉치를 주고받던 그분이 아니다. 마음이 기우뚱해진다.

긴 적막이 흐르고, 병실의 인기척에 어른이 눈을 뜨신다. 금방 알아보고 반색을 하신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어제 만난 사람인 듯 내 이름을 부르시다니. 오래전에 한 번 뵙고, 스승의 날에나 안부 전화를 드리는 제자인데. 마음이 뜨끔하다.

건강하실 때 찾아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뭐가 분주한지 시간에 떠밀려 이렇게 되고 말았다. 멀리 산다는 이유로, 바쁘다는 핑계로 병상의 어른을 만나게 된 셈이다. 함께 벚꽃 구경을 할 수 있었고 가을 들길을 걸을 수도 있었는데, 이제 선생님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형편이다. 제자가 책을 냈다고 기뻐하시고, 안부 전화 한 통만 드려도 다른 친구들에게 자랑하셨다는데 너무 늦어서 죄송하다.

선생님이 내 손을 토닥거리신다. 괜찮다 괜찮다, 마음을 다독여주시는 것 같다. 습자지같이 얇은 손에서 온기가 전해진다. 서서히 번지는 따스한 강물이다. 보이지 않지만 흘러드는 그 마음이 있어 외롭지 않았고, 묵묵히 지켜보는 눈길들이 있어서 거친 세월을 건너올 수 있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다. 토닥토닥, 선생님의 야윈 손을 다독이니 눈물이 핑 돈다. 따스한 강물이 서서히 휘돌아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봐주던 눈길들이 사라져 가는구나 싶으니 마음이 허허로워진다. 나도 그 몫을 해야 하는데, 따스한 어른으로 남아야 하는데 멀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주위를 돌아보고 품어주는 일일진대, 아직도 제 앞가림도 못 하나 싶어 민망하다.

이윽고 선생님이 환자복 윗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신다. 마른 삭정이 같은 손에 들린 지폐 두 장.

“가서 밥 먹어라.”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한참 머뭇거리다가, 접고 접힌 지폐를 두 손으로 받아든다. 당신은 곡기가 당기지 않아 사이다로 연명하면서도 제자의 한 끼를 걱정하는 선생님이시다. 그 위로 몇 년 전에 세상을 뜨신 친정아버지의 얼굴이 겹친다.

“날이 풀리면 다시 올게요.”

병실 문을 나서는데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신다. 한결 수굿해진 바람이 마른 나무들을 토닥이는 날이다.

한 달 후, 선생님은 먼 나라로 떠나셨다. 날이 풀리고 꽃이 피었다는 소식만 바람결에 흩날렸다.

제자 수필가 강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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