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 할아버지 박정환(1907∼1975)
초등학교 입학 전, 고향을 떠나기 전,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저녁마다 취침 전, 온 가족이 모여 가정예배를 드렸다. 나는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예배하곤 했다. 내 신앙이 뿌리내린 텃밭이었다. 다섯 살 적, 이웃의 친구 집에서 외박한 적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친구 집의 아침 밥상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그때, 하나님께 감사기도도 하지 않은 채 밥숟가락이 입으로 들어가는 친구네 식구들의 밥상을 목격하며 쓰나미 같은 문화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 나는 모든 사람은 다 우리 집과 같이 예수 믿고 사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충돌 지점에서부터, 할아버지 박(밀양 朴), 정(正) 자 환(煥) 자의 존재 의미가 내 안에 뚜렷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장손인 내 인생에 새겨진 할아버지의 인생과 삶, 신앙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순진무구(純眞無垢) 그 자체이신 분이다. 과장도 꾸밈도 뻐김도 자랑도 떠벌림도 없는 분이다. 그냥, 그 존재 자체로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었다.
나는 동시대 사람에 대해서는 누구의 평가나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일을 매우 싫어한다. 내가 직접 겪어 본 바대로만 ‘예, 아니오’ ‘그렇다, 아니다’ 말하는 신조로 살아왔다. 할아버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겪은 할아버지 이야기가 할아버지를 할아버지 되게 하는 손자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할아버지는 내가 만난 인생의 바로 ‘그분’, 바로 ‘그 첫 사람’인 분이다. 내가 태어난 시기는 우리나라가 가난했던 1960년대 초다. 우리 집 길 건너편에 중국 화상이 운영하던 중화요리 집이 있었다. 네댓 살 적이다. 하루는, 날마다 동네방네 풍미 가득한 냄새를 풍겨대는 우동을 견디지 못하고 ‘할아버지 우동 사 주세요’ 했다. 나도 지금 손자가 있어 알지만, 손자의 요구를 웬만하면 안 들어주는 할아버지가 어디 있겠나? 그런데 나의 할아버지는 ‘호(鎬)야, 우동은 안 된다’라고 하셨다. 그 이유로 ‘저 집은 중국 화상인데, 식재료조차도 중국 화상끼리만 사고판단다’ 하셨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가난한데, 중국 사람에게 돈 쓸 수 없다는 말씀이셨다. 최소한의 상거래 도의를 가르쳐 주셨다. 해방 후, 할아버지는 남다른 다음 세대 교육에 큰 뜻을 두시고 고향 춘산에 춘산중을 앞서 설립하셨다. 교장으로 봉직하실 때, 솔선수범 학생들을 겸허하게 섬기셨다. 자전거를 타고 길을 가시다 학생을 만나면, 꼭 자전거에서 내려서 중절모를 벗고 정중하게 인사를 받으셨다. 이런 학교에 의성, 군위, 청송, 안동 등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여와서 교육을 받았다. 등교 시간 전에, 친히 똥지게를 지고 학교의 화장실을 치우기도 하셨다. 이것이 어찌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모습이었겠는가. 할아버지의 인생과 삶의 근저에 예수님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의 복음 말씀이 뼛속까지 체화됐기에 그것이 삶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가 어릴 적 고향에서 늘 보아오던 할아버지의 하루 첫 일과는, 이른 새벽 왕복 5㎞쯤 되는 거리에 있는 금천교회 새벽기도회에 다녀오시는 일이었다. 눈비도 무릅쓴 사시사철 변함없는 일상의 시작점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애국 운동, 신사참배 반대, 농우회와 관련한 의성경찰서 투옥사건을 겪으시고 해방 후 초대 민선 면장 등을 지내며 대사회적으로 거대담론을 품고 사신 할아버지. 내 인생에서 만난 진짜 예수쟁이의 ‘첫 사람’이다. 장손인 나의 최대의 유산과 삶의 지표가 되신 할아버지! 자랑스럽습니다. 그립습니다.
손자 박은호(정릉교회 제5대 위임목사)
‘그립습니다 · 자랑합니다 · 미안합니다’ 사연 이렇게 보내주세요
△ 카카오톡 : 채팅창에서 ‘돋보기’ 클릭 후 ‘문화일보’를 검색. 이후 ‘채팅하기’를 눌러 사연 전송
△ QR코드 : 독자면 QR코드를 찍으면 문화일보 카카오톡 창으로 자동 연결
△ 전화 : 02-3701-5261
▨ 사연 채택 시 사은품 드립니다.
채택된 사연에 대해서는 소정(원고지 1장당 5000원 상당)의 사은품(스타벅스 기프티콘)을 휴대전화로 전송해 드립니다.
주요뉴스
시리즈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