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사회주의 위험 딛고 민주공화국 길 닦은 5·10 총선 내년 4·10 총선도 정체성 선택
자유민주 지속이냐 변질이냐 동맹·법치·도덕 문제도 영향권 대연합 없이는 尹 승리 힘들 것
‘질문 3, 귀하가 찬성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본주의 14% 1189명, 사회주의 70% 6037명, 공산주의 7% 574명, 모릅니다 8% 653명.’(동아일보 1946년 8월 13일자 3면) 해방 1년을 맞아 미 군정청 여론국이 실시한 대규모 여론조사의 결과다. 조사 방법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없고, 응답자 수와 비율의 일부 불일치도 있지만, 당시 분위기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로부터 2년 만에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수립하고, 유엔의 승인까지 받아낸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38선 북측에서는 소련이 일찌감치 공산체제 이식에 착수했지만, 남측의 미국은 민주적 선택을 지향했던 만큼 삐끗하면 무정부 상태나 인민공화국으로 귀결될 수도 있었다. 소련의 방해 탓에 유엔이 정한 시한(1948년 3월 31일)을 넘겨 5월 10일 제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고, 제헌의회는 한 달 남짓 만에 ‘국가 설계도’인 제헌헌법을 만들어냈다.
그 기초가 된 ‘유진오 초안’은 양원제와 내각제, 사회정의 내에서의 경제상 자유, 중요기업의 국영화와 농지개혁 등을 담고 있었다. 특히 경제 균등을 앞세웠는데, 토론에 나선 의원들도 당시 여론을 반영하듯 대부분 사회주의적 경제 질서를 선호했다. 광복군 총사령관 출신의 지청천 의원은 ‘만민 평등의 민족사회주의’를 주장했다. 자유시장경제 취지의 논지를 펼친 사람은 조한백 의원뿐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토론 끝에 올바른 선택을 했다. 국제 정세와 공산주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봤던 이승만 당시 국회의장의 향도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지난 75년 동안 개헌과 헌정 중단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자유민주주의라는 국가 정체성 자체가 흔들린 적은 없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헌법 정신의 본질에 속하는 ‘자유’를 삭제하려는 세력이 점차 강해진다. 문재인 정권 시절에 그런 개헌이 시도된 적도 있다. 따라서 내년 4월 10일 제22대 총선은 결정적 선거(critical election)를 넘어 국가의 근본 방향을 다시 결정하는 제2의 제헌의회 선거와 다름없다. 천변만화가 예상되지만, 본질은 자유민주주의의 지속이냐 변질이냐 사이의 선택이다. 현실적으로는 윤석열과 이재명의 대선 연장전 양상으로 흐를 개연성이 크다. 상대 진영에 대한 적대감이 너무 강해 내 편 결함은 묻힐 것이기 때문이다. 온갖 사법 리스크에 노출된 이재명의 활로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재명은 신익희-조병옥-윤보선-장면-김대중으로 이어지는 정통 민주당과는 거리가 멀다. 김대중·노무현도 평등과 분배를 강조했지만, 기업을 부의 착취자 아닌 창출자로 인정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직접 기업을 설립해 경영했다. 문재인과 이재명은 필요할 때만 기업을 이용했다. 김대중은 대북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미국과 일본을 중시했다. 노무현 역시 미국과 사사건건 충돌하면서도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이라크 파병 등 필요한 결단을 피하지 않았다. 문재인은 달랐다. “중국은 큰 봉우리”라며 “중국몽을 함께하겠다”고 했다. 이재명은 ‘죽창가 반일’ 입장이 선명하다. 나랏빚을 내서라도 돈을 펑펑 쓰자고 주장한다. 자신의 온갖 혐의가 분명한데도 되레 검찰을 공격한다. 법치주의와 포퓰리즘도 갈림길에 섰다. 윤미향 조국 등을 보면 과학과 괴담, 도덕과 몰염치의 대결도 된다. 이 모든 것이 ‘판돈’처럼 총선에 걸려 있다. 누가 승리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나라가 된다.
윤 대통령의 정치적 운명도 심판대에 올랐다. 이승만은 한국 총선거 실시에 대한 유엔 결의(1947년 11월) 이후 최대한 신속하게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면 나라가 나락에 빠질 것을 알고 무조건 서둘렀다. 인민공화국 아닌 민주공화국이기만 하면 다른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관계자들을 설득·압박하고 그래도 안 되면 자신이 양보했다. 윤 대통령에게도 포퓰리즘과 괴담 선동을 뚫고 국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 역사적 책임이 있다. 자유민주 대연합이 승패의 관건이다. 이승만이 일단 정부를 세운 뒤에 고칠 것은 고치고 다툴 것은 다투자고 했듯이, 윤 대통령도 총선 승리에 집중하고, 선거 뒤에 따질 건 따진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예부터 법가(法家)는 행정엔 유능하지만, 민심을 등한시해 결말이 힘든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