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술이 지나간 자리 - (28) 연재를 마치며
주판·정수기·팩스 등
대단한 물건 아닐지라도
당시 삶과 밀접하게 연관
테크놀로지는 욕구의 반영
그것이 ‘지나간 자리’서
인간의 본성 찾을 수 있어
2년 넘게 평균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지면을 차지하던 ‘기술이 지나간 자리’ 연재를 마무리할 때가 왔다.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잊을 만하면 한 편씩 글이 올라오게 되는 데다가 매번 다른 기술(또는 기술을 이용하는 사회적 양식)을 다루게 되니 연재라는 느낌이 약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들(김태호, 박동오, 최형섭)은 매달 한두 차례씩 회의를 열어 다양한 소재를 다루면서 최소한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늘 마지막 회차에서는 연재를 진행하면서 그동안 필자들 사이에 오간 논의 사항을 소개하고, 총 26개의 사라진 테크놀로지의 ‘일생’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었는지 정리해 보고자 한다.
연재의 취지를 소개하는 첫 회차에서 우리는 “쓰러진 기술에 대한 부고(訃告), 즉 태어나서 성장하고, 성장기를 거친 후 쇠퇴해 죽음에 이른 테크놀로지의 일생에 대한 총평을 시도해” 보겠다고 밝혔다.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부고’라는 접근을 택한 이유는 그것이 특정한 기술이 인간과 관계 맺는 방식을 가장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의 부고 전문 기자 제임스 해거티가 쓴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라는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이 우리의 눈길을 끈 이유는 부고 기사의 주인공이 꼭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거나 대중적 사랑을 받은 유명인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인생도 나름의 이야기를 남길 수 있고, 이야기를 통해 한 사람의 삶이 가지는 의미를 매듭지을 수 있는 것이다. 즉,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죽음도 중요한 기삿거리가 될 수 있다.

‘기술이 지나간 자리’ 필자들은 연재를 통해 “기술” 또는 “테크놀로지”라는 단어에 덧씌워진 오해를 불식시키고 싶었다. 세상이 위인과 유명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테크놀로지란 휘황찬란한 미래를 약속하는 최첨단 기술만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현대사회에서 기술이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만능열쇠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빈곤이 문제인가? 최첨단 육종 기술을 이용해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서비스 인력이 부족한가? 인공지능을 비롯한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해 인간 노동을 대체하면 된다. 하지만 기술이란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쓰러진 기술에 대한 부고”라는 접근은 이러한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쓰러진 기술”이란 그 자체로 한물갔거나,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기술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연재에서 다뤘던 주판이나 기차표, 쌀통 등 일상적인 테크놀로지는 찬란한 미래를 약속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삶과 긴밀하게 엮이며 모종의 편리함을 주기 위한 고안이다.
이토록 다양한 ‘기술이 지나간 자리’를 살펴봄으로써 무엇을 알 수 있는가? 1차적으로는 기존의 기술이 사라지고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는 과정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하나의 기술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유사한 기능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해 기존의 기술을 대체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특정 기술이 진부화(陳腐和·obsolescence)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연재에서 다뤘던 카세트테이프나 팩스가 그러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기능을 “더 잘” 수행한다는 기준이 항상 명확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은 모름지기 더 값싸게, 더 빠르게, 더 가볍게, 더 높은 신뢰도를 가진 테크놀로지를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기술 변화가 이 같은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뿐더러, 기존 기술이 수행한 모든 기능을 다음 세대 기술에서 포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전화선을 이용해 문서를 전송하는 팩스는 스마트폰과 이동통신이 일반화되면서 완전히 ‘진부화’된 기술로 생각할 수 있다. 카카오톡을 사실상 모든 한국인이 이용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팩스의 기능을 100% 대체해 나갈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명멸하는 기술에 대한 탐구를 통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통찰은 인간의 욕망이 무한하지 않다는 점이다. 기술이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활동의 결과라면, 다양한 기술의 일생을 살펴봄으로써 인간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동안 새롭게 등장한 테크놀로지 중에 이전까지 인간이 원하지 않았거나, 원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얼마나 있는가? 진정으로 ‘급진적(radical)’인 기술 혁신이 존재하는가? 급진적 기술 혁신의 후보를 꼽자면 아마도 1903년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발명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인류가 가진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자 하는 욕망을 기술적으로 현실화했기 때문이다. 라이트 형제 이후 등장한 모든 비행 기술은 ‘라이트 플라이어(Wright Flyer)’의 개량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기본적 욕망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미국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1908∼1970)가 1943년에 발표한 “인간 동기 이론(A Theory of Human Motivation)”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에서 시작해 안전, 사랑과 존경, 인지적·미학적 욕구를 거쳐 자아실현을 이루고자 하는 단계까지 이어진다. 우리가 연재를 통해 살펴본 기술적 장치들도 대부분 이와 같은 인간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고 아프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가 가장 기본적이다. 생존 본능이 충족되었다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욕구가 나타난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더 복잡한 정보를 더욱 신속하게 주고받는 것이 인간의 중요한 욕구 중 하나인 것이다. 이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로 이어진다. 내가 삶을 영위하는 공동체가 혼란에 빠지지 않고 효율적이고 질서 있게 운영되는 것은 삶의 예측가능성을 높여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테크놀로지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 욕망의 반영이다.
결국 기술에 대한 탐구는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이다. 특히 다양한 테크놀로지 없이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생존조차 보장하기 어려워진 오늘날에는 더욱 그렇다. 인간은 다양한 욕구를 지니며 그 욕구의 범위가 끊임없이 확장해 나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기술적 ‘기능’은 그리 변화하지 않았다. 예컨대 통신기술을 살펴보면, 1844년에 새뮤얼 모스(Samuel Morse·1791∼1872)가 워싱턴DC와 볼티모어 사이의 전신을 개통한 순간, 인류는 거리에 구애받지 않는 즉각적 통신의 시대로 들어섰다. 본 연재에서도 다뤘던 이리듐, 하이텔 단말기처럼 지나간 기술을 포함해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무선통신기술은 통신이라는 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한 200년 전 기술의 개량일 뿐이다. 이렇듯 인간이 요구하는 기술적 기능이 변화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지닌 근본적인 생물학적 한계를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테크놀로지란 외부에서 주어져 인간 미래의 향방을 결정짓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술을 인간이라는 종이 특유하게 가지는 욕구의 반영으로 바라본다면, 그동안 인류가 만들어왔고 앞으로 만들어갈 기술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조금씩 개량을 거듭하며 나아갈지도 모른다.

최형섭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과학잡지‘에피’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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