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5월 김영삼 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회장은 뉴욕타임스 도쿄 지국장 헨리 스토크에게 “미국이 전두환을 버려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2차 가택연금에 들어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YS는 언론 통제의 전면 해제, 정치범 석방, 대통령 직선제 등 민주화 5개 항을 내걸고 단식에 들어갔다. 23일 동안 목숨을 건 투쟁을 지속했다. 전두환 정부는 YS의 건강이 악화하자 5월 25일 서울대병원 특실에 강제 입원시켜 링거 치료를 받게 했으나 6월 9일까지 단식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정권의 언론 통제로 5월 18일부터 6월 8일까지 신문에 ‘단식’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동아일보 등 일부 언론은 ‘모 재야 인사의 식사 문제’ ‘정치 현안’ ‘정치 관심사’ 등으로 겨우 1단 기사로만 보도할 수 있었다. 이때 YS의 목숨 건 단식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한 민주산악회원들의 눈물겨운 활동이 있었다. 골목길에서, 버스 안에서, 등산길 입구에서 단식을 알리는 데 전력을 다했다. 손명순 여사가 직접 외국 언론에 전화해 성명서를 낭독해 줬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요원들은 YS 단식을 중단시키기 위해 병실 밖에서 불고기 냄새를 풍기기도 했다고 한다.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민주정의당 권익현 사무총장을 YS에게 보내 단식 중단을 종용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단식 중단을 간곡히 권유한 뒤에야 YS는 단식을 중단했다. 언론에 처음으로 단식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YS가 단식을 중단한 뒤였다. 동아일보는 6월 10일 자 사설에서 ‘우리는 언론의 정상적인 기능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비정상의 유언통로(流言通路)를 확산시켜온 바를 자성한다’고 했다. YS는 아무 준비도 없이 단식에 들어가는 바람에 장폐색이 발생해 정말 죽을 고비를 넘겼다.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은 “수십 년 후에도 YS는 단식 얘기만 나오면 표정이 일그러질 정도였다”고 한다.
40년이 지난 지난달 31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반대 등 3개 항을 요구하며 단식에 들어갔다. ‘출퇴근 단식’에 유튜브 생중계도 한다. 의원들의 표정도 침울하지 않고 밝다. 괴이한 단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