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42) 부분과 전체
전체는 부분의 상위가 아냐
부분들의 연관성에 따라서
유연성 있게 새롭게 생산돼
어떻게 작은 부분이 합쳐져
전체가 되는지 철학적 고민
정치제도 본질과도 직결
이론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학생 시절 플라톤이 쓴 우주론 ‘티마이오스’에 빠져 있었다. 지붕 위에 혼자 올라가 볕을 쬐며 이 책을 읽곤 했다. 책에서 그를 매료시킨 부분은 물질의 가장 작은 부분이 어떻게 합쳐져 보다 큰 단위를 이루는가에 대한 플라톤의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이었다. 하이젠베르크의 지적 편력을 기록한 자서전 ‘부분과 전체’는 플라톤 앞에서의 이런 당혹감에 관한 기록으로 시작한다. 젊은 날의 이 일화가 그의 평생의 학문적 관심을 방향 짓는다. 이 양자역학의 거장은 ‘부분과 전체’의 마지막에 플라톤이 말한 전체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가 바로 양자역학의 소립자임을 깨닫는다. 양자택일의 방식으로 계속 서로 결합해 나가는 소립자들.
플라톤에서 하이젠베르크에 이르기까지, 철학과 과학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영역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학문적 통찰에 몰두하게 한 두 개념이 바로 ‘부분’과 ‘전체’이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리학은 접어두고, 일단 우리가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유기체’의 개념이다. 신체의 부분들은 몸 전체의 생존을 위해 기능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개념 말이다. 흔히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엽록소는 식물의 광합성을 ‘위해서’ 있다. 동물의 털은 동물을 추위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있다. 이런 말들이 뜻하는 것은, 신체의 작은 부분들이 전체 신체의 생존을 ‘목적’으로 가진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목적론적 사고방식이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신체의 부분들, 즉 기관들이 전체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자연은 특정한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는 생각으로 귀결된다.
이런 생각은 과학적이기보다는 ‘신학적’이다. 부분이 전체를 목적으로 삼아 거기 부역한다는 생각을 확대하면, 가지각색의 피조물들은 인간종의 풍요를 위해서 있고, 인간은 결국 신이 역사의 최종 지점에 설정한 목적을 위해 있다는 등의 생각으로 귀결된다.
작게는 신체의 부분들은 전체로서의 신체의 생존을 목적으로 한다는 생각, 그리고 크게는 자연의 다양한 부분들을 하나의 전체로 수렴케 하는 목적이 있다는 생각을 현대사상은 배격한다. 예컨대 들뢰즈의 유명한 개념 ‘기관들 없는 신체’는, 기관들이란 결코 전체로서 유기체의 삶을 목적으로 부역하는 부분들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목적론을 버린다면, 이제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부분과 전체에 관한 흥미로운 보르헤스의 텍스트가 있는데, 푸코의 잘 알려진 책 ‘말과 사물’은 보르헤스의 이 작품을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보르헤스의 텍스트에 인용된 ‘어떤 중국 백과사전’에는 ‘동물이 a) 황제에게 속하는 것, b) 향기로운 것, c) 길들여진 것, d) 식용 젖먹이 돼지, e) 인어(人魚), f) 신화에 나오는 것, g) 풀려나 싸대는 개, h) 지금의 분류에 포함된 것…’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이다.”(이규현 역) 결코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이 분류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지금의 분류에 포함된 것’이라는 h 항목이다. 그 항목은 앞서 언급된 모든 동물을 포함하며, 또 그 동물들에 대한 a부터 g까지의 분류 방식들 역시 포함한다. 즉 h는 a부터 g까지의 모든 ‘부분들’을 자신 아래 두고 있는 ‘전체’이다. 그런데 동시에 h는 a부터 g까지의 분류들과 ‘동등한 차원’에 나란히 놓이는 또 하나의 분류, 또 하나의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것이 사유 가능할까? h가 a부터 g까지의 분류를 포함할 때 h는 다른 분류들과 나란히 놓일 수 없다. h가 a부터 g와 동등한 차원의 한 분류일 때 h는 하위분류들을 포함하는 상위의 전체일 수 없다. 한마디로 보르헤스가 소개한 저 중국의 백과사전은 사유될 수 없다. 푸코는 말한다. “보르헤스의 열거에 감도는 기괴성은 항목들을 서로 연결할 공통의 바탕 자체가 무너져 있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즉 항목들을 안정되게 연결 지어줄 합리적 질서라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런 기괴한 백과사전으로부터 푸코는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고 분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존의 합리적 질서란 유일무이한 진리가 아니라는 것, 전혀 다른 방식의 사유가 등장할 수 있고, 우리가 익숙해져 있던 합리적 질서는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통찰을 얻게 된다.
저 중국의 백과사전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가능할까? 부분과 전체 사이의 저 이상한 관계는 단지 우리의 합리성이 넘볼 수 없는 미지의 사유가 가능하며, 그것에 의해 우리의 합리성이 언젠가 와해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무서운 고지자(告知者)에 불과한 것일까?
현대 철학은 더욱 적극적으로 바로 저 중국의 백과사전에 나타난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사유하려 한다. 들뢰즈가 보여주듯이 말이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 ‘안티오이디푸스’ 등에서, 부분들의 전체이기는 하지만, 부분들을 통일하지 않고, 지금까지 있어 온 부분들 곁에 ‘하나의 새로운 부분으로서 첨가되는 전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즉 부분들을 지배하는 상위의 원리로서의 전체가 아니라, 부분들 곁에 나란히 놓이는 전체, 또는 부분들의 효과로서의 전체 말이다.
이런 전체가 무엇인지 떠올리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그러니 한 가지 예를 만들어 보자.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발자크의 작품 세계에 대해 프루스트가 쓰고 있는 한 구절을 가져온다. “발자크는 자기가 예전에 쓴 작품들을 돌이켜 보다가 갑자기 그 작품들을 연작 형태로 결합하여 동일한 인물들을 다른 작품에서 다시 등장하게 한다면 더욱 멋질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발자크는 예전의 작품들과 이어 맞추기 위해서 펜을 들어 자기 작품에 한 번 더 손을 대었다. 그것은 작품에 마지막으로 펜을 대는 것이었지만 그중 가장 탁월한 것이었다. 나중에 온 통일성은 작위적인 것도 아니고 허구적이지도 않다…. 아마도 나중에 생겨났기에 더 실재적일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은 프루스트가 발자크의 ‘인간희극’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희극’은 발자크가 자신이 평생 발표했던 약 90편의 소설들 전체에 대해 붙인 이름이다. ‘인간희극’이라는 전체 기획은 창작의 원리로서 모든 작품의 생산에 앞서 있지 않았다. 발자크는 애초에 하나의 통일된 전체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작품들을 써나가지 않았다. 이미 쓴 과거의 소설에 나오는 주변적인 인물을 다른 작품을 쓸 때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부분들(소설들) 사이의 연관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착상은 뒤늦게야 온 것이다. 그리하여 전체성은 나중에야 출현한다. 이 전체성은 결코 모든 부분들을 지배하는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부분들이 출현한 뒤에 부분들 옆에 나란히 오게 된 전체성이다. 발자크의 소설들(부분들)은 모두 제각기 독립성을 가진다. 나중에 오게 된 전체성, 마지막에 붙여진 전체의 이름 ‘인간희극’은 각각의 소설의 독립성을 해치지 않은 채 이 부분들 옆에 놓인다. 즉 전체이지만 부분들보다 우월하지 않고 부분들과 동등한 지위를 지니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런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보르헤스가 이야기해 준 중국의 백과사전의 사유 방식을 현실화하고 있지 않은가? 부분들의 전체이면서도, 부분들 옆에 놓여 있는 또 하나의 부분으로서 전체.
고대 이래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사유하는 것은 어느 학문 영역에서나 근본적이었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방식으로, 모든 것을 통일하는 원리로서 가장 앞에 오는 전체가 아니라, 부분들 옆에 또 다른 한 부분으로 있는 전체를 사유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이 사유는 단지 추상적 사변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 현실적인 절실함을 가진다. 바로 이 사유로부터 민주주의적인 정치제도, 자치적인 지방들과 중앙정부의 관계, 시민들과 통치의 관계 등등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앙정부가 전체이고 통일성이라면, 그것은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주관하는 원리로서의 전체가 아닐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 본문 중 언급된 책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는 고대 우주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우주에 대한 고중세의 사고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부분과 전체’는 양자역학의 대가 하이젠베르크의 학문적 자서전으로 20세기 과학자들의 치열한 탐구 현장을 들여다볼 수 있다. 푸코의 ‘말과 사물’은 르네상스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지식의 정체성’의 극단적 변화를 추적하고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은 현대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연구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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