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주철환의 음악동네 - 곽순옥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한때 회전의자는 출세의 상징이었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 (중략) 아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 원곡을 부른 가수 김용만(1933년생)은 불과 3주 전(8월 28일)에도 ‘가요무대’(부제 ‘월말 신청곡’)에 출연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음정, 박자 모두 정확했고 표정도 90세 노인답지(?) 않았다. 마치 ‘인생’이라는 제목의 짧은 모노드라마를 본 느낌이었다. 김용만은 그 전주(8월 21일)에도 같은 프로에 출연했다. 부제는 ‘힐링 가요’였는데 그날 부른 노래 제목은 ‘청춘의 꿈’이었다.
행복은 높은 곳보다 넓은 곳에서 주로 서식한다. 짧은 중역보다 긴 현역이 낫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오늘(9월 18일)도 ‘가요무대’(1813회)를 진행하는 김동건 아나운서(1939년생)는 1963년 동아방송 1기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올해로 데뷔 60년. 그런데 발음도 단정하고 눈빛도 그대로다. 심지어 인사말도 한결같다. 앞서 언급한 가수 김용만은 1953년에 ‘남원의 애수’로 데뷔했으니 올해로 데뷔 70년 차다. 두 분에겐 올해의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역전의 용사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역전(歷戰)은 전쟁을 많이 겪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역전의 용사가 되려면 전쟁을 여러 번 겪어야 하고 그 전쟁에서 마침내 살아남아야 한다.
역전의 명수라는 말도 있는데 여기서 역전(逆轉)은 형세를 뒤집는다는 뜻이다. 9회 말 역전승은 그 전까지 지고 있다가 이기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역전의 명수가 되려면 먼저(아니 계속) 져야 한다. 승승장구하는 자에게 역전의 명수란 타이틀은 돌아가지 않는다. 결국 최고의 복이 전화위복이라는 말은 단순한 위로의 언어가 아니다. 말장난을 연장하자면(선을 넘은 감이 있지만) 최고의 절은 우여곡절이고 최고의 숙소는 파란만장이며 최고의 전시는 산전수전이다.
노래는 죽지 않아도 가수는 때가 되면 죽는다. 내가 좋아했던 노래, 그 노래를 불러준 가수의 죽음은 옷깃을 여미게 한다. 여민다는 건 벌어진 옷깃을 합쳐 단정하게 한다는 뜻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데 마음을 스쳐 지나간 노래, 그 가수의 죽음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다. 나의 추도 방식은 단순하다. 그의 노래를 여러 번 들으며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평가)보다 남은 시간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숙려)를 곱씹으며 애도의 시간을 갖는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요양병원에서 숨을 거둔 노인이 있다. 직계 가족이 없어서 장례 치를 사람을 찾는데 누군가 말한다. “이분 옛날에 ‘카우보이 아리조나 카우보이 광야를 달려가는 아리조나 카우보이’ 그 노래 부르던 가수 같은데” 원로가수 명국환(1927∼2023)은 단칸방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살다가 요양병원에서 눈을 감은 지 보름 후에야 가수협회 주관으로 빈소가 마련됐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중략) 이 세상 끝까지 가겠노라고 나하고 강가에서 맹세를 하던’ 가수 곽순옥(1932∼2023)도 오랜 투병 끝에 지난주(9월 12일) 별세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을지 몰라도 노인을 위한 노래는 있다. 그게 ‘가요무대’의 존재 이유 중 상위에 속한다.

그냥 흘러간 노래가 아니라 여기까지 흘러온 노래를 3단 고음의 신인가수가 멋들어지게 부르는 것보다 주름진 얼굴의 원곡 가수가 숨(호흡)은 좀 차더라도 정성껏 부르는 걸 올드팬은 더 보고 듣고 싶어 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작가·프로듀서·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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