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 슬로 텐션 소설 7選

편의점, 세탁소, 서점, 빨래방, 식당 등 일상 속 친근하고 익숙한 공간을 중심으로 나와 같은, 혹은 내 가족, 내 친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 위로하고 응원하는 이야기.

요즘 서점가를 휩쓰는 ‘슬로 텐션(slow tension)’ 소설이다. 읽기 쉽고 몰입도 빠른데, 큰 자극 없이 읽을수록 마음이 편하다. 어느새 바쁨도 내려놓고, 긴장도 풀고, 나만의 삶의 속도를 되찾는다.

이번 추석 연휴는 기회다. 올해 책 한 권 못 읽었어도, 평생 소설 한 편 완독한 적 없어도 누구나 ‘소설 읽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 한껏 늘어져, 모처럼 느리게 흐르는 세상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북리뷰팀이 추천하는 7권의 ‘슬로 텐션’ 소설과 함께라면.

벚꽃신사… 해변마을… 작지만 따뜻한 응원

가마쿠라 역에서 걸어서 8분, 빈방 있습니다


“아무 생각 안 해도 돼. 마음이 버거울 때는 그냥 파도 소리를 듣는 거지.” 늘 이렇게 말하던 아빠가 돌아가셨다. 작은 카페를 물려받은 주인공 카라는 대단한 연애 경험도,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도 없이 40대 중반이 됐다. 홀로 카페를 운영하며 소소한 일상을 꾸려나가는데, “할머니가 되면 같이 살자”고 약속했던 친구 미키코가 이혼 후 들이닥치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셰어하우스를 시작한다.

오치 쓰키코 작가의 ‘가마쿠라 역에서 걸어서 8분, 빈방 있습니다’(마시멜로)는 카라 아버지의 조언 같은 소설이다. 즉, 마음이 버거울 때, 아무 생각 없이 듣는 파도 소리. 셰어하우스의 이름은 ‘우리집’이라는 뜻의 ‘오우치’로, 만화 슬램덩크의 배경이자 도쿄 관광객들이 녹색 완행열차를 타고 찾아오는 가마쿠라에 자리했다. 향긋한 커피와 맛있는 카레가 있는 오우치에 성격도 성장 환경도 다른 사람들이 입주하고, 이들이 각자의 사연을 털어놓으며 전개된다. 정말로 있을 것만 같은, 있었으면 하는 ‘우리집’ 아닌가. 벚꽃 만발한 신사, 노을 지는 해변 등 가마쿠라 볼거리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읽는 ‘행복’을 더한다.

추억의 밥상서 다시 만나는 그리운 얼굴

고양이 식당, 추억을 요리합니다


추석에 또 다른 이름이 있다면 ‘추억’이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건 그런 것이다. 우리는 추석에 과거, 현재, 미래의 ‘얼굴’과 마주한다. 이렇게 특별한 날, 기적처럼 ‘그리운 얼굴’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속절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 생각하는 그 꿈. 다카하시 유타의 소설 ‘고양이 식당, 추억을 요리합니다’(빈페이지)에서는 이뤄진다. 소설에는 ‘추억의 밥상’을 주문해 먹으면 그리운 영혼을 만날 수 있다는 신비한 ‘고양이 식당’이 등장한다. 자신을 살리고 사고로 안타깝게 죽은 오빠를 만나는 동생,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첫사랑과 데이트를 하는 노신사 등 이 식당에선 저마다의 사연과 추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찾아와 고인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아픔과 상처를 치유한다. 꿈을 꿨나, 환영인가, 상상일까. 그리운 이를 만나고 난 후 식당을 나설 때, 이들은 어떻게 변화할까.

네 개의 추억 밥상과 네 개의 일화로 구성된 책의 끝엔 달걀말이 샌드위치, 매실장아찌 잼 등 고양이 식당의 추억 요리 레시피가 부록으로 담겨 있다.

물건에 얽힌 소소한 사연 들여다보는 재미

수상한 중고상점


‘수상한 중고상점’(놀)은 ‘중고’ 서적이다. 읽는 순서에 따라 줄거리가 달라지는 ‘N’의 작가 미치오 슈스케가 2011년에 발간한 책으로, 최근 힐링소설 열풍을 타고 역주행했다.

찾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구해주고, 출장 감정 서비스에도 충실한 한 중고상점. 가게 운영보다는 사건에 휘말리기를 기대하고 늘 엉뚱한 추리를 늘어놓는 점장과, 장사 수완이 없어 손님들에게 바가지를 쓰는 부점장이 등장한다. 주인공들은 어설프고 어수룩하지만, 신비한 능력이 있다.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 각자의 고민과 사연을 품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힘. 돈보다 물건에 얽힌 사연을 해결하는 게 우선 순위인 가게는 어쩌면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사들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상점 시리즈’ 인기에 힘입어 10여 년 만에 제목을 바꿔 재출간됐으나, 단순히 유행에 편승한 소설은 아니다.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을 휩쓸었고, “넷플릭스보다 재밌게 쓰고 싶다”며 분투 중인 작가가 설계한 ‘느리고 따스한’ 세상에 입성해 보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을 따라 흐르는 소설 속에서 ‘각자의 계절’을 만나게 될 것이다.

행복과 불행,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있다면?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


“당신의 불행을 파시겠습니까?”라는 문장이 눈을 사로잡는다. 비가 오면 열리는 신비한 상점에선 불행을 팔고, 원하는 행복을 살 수 있다. 나의 불행을 나로부터 떼어내는 것도 기쁜데 불행을 ‘팔아’ 내가 원하는 행복을 살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당장 달려가고 싶어진다. 신인 작가 유영광의 장편 소설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클레이하우스)은 이 신비로운 상점에 초대된 여고생 세린의 이야기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마치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듯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펼쳐진다는 것이다. 자유자재로 크기가 바뀌는 먹보 안내묘 잇샤, 눈물과 땀으로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피우는 도깨비, 비난과 칭찬의 말로 향수를 만드는 도깨비 등 개성 가득한 캐릭터들은 책을 읽는 내내 독자의 머릿속을 유영하며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신인 작가의 작품으로는 이례적으로 출간 전부터 일본, 대만, 폴란드, 러시아 등 6개국에 판권을 수출한 화제작이기도 하다. 최근까지 총 10개국에 판권이 팔렸다. 애니메이션 제작도 확정됐다.

흔한 빨래방, 흔한 사람들의 소통과 격려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


악착같이 벌어도 늘 돈에 허덕이고 육아는 끝이 없다. 누구 하나 “힘들지 않냐”라고 묻는 사람이 없다. 미라는 연남동 구석의 한 빨래방에 앉아 빨래가 되길 기다리며 탁자 위 무심하게 놓인 다이어리에 이렇게 적는다. “살기 싫다.”

며칠 후 그 밑에 누가 적은 글이 보인다. “방울토마토에도 제일 맛있는 때가 있답니다. 사람도 그렇겠지요. 떫은 맛도 지나가고 인생이 제일 맛있을 때가 있을 겁니다.”

김지윤 작가의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팩토리나인)은 연남동 구석에 자리잡은 24시간 무인 빨래방을 무대로 한다. 빨래방에 놓인 연두색 다이어리에 각자의 고민이 적히고 그 위로 다른 사람들의 위로의 말이 쌓인다. 평범하기 그지없던 빨래방은, 저마다의 이야기가 모여 어느새 사람들의 ‘마음의 쉼터’가 된다.

전자책 구독 서비스 플랫폼인 밀리의 서재의 신진 작가 플랫폼 밀리로드에 연재됐을 당시 내내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다 독자들의 요청으로 종이책으로 태어난 이 책의 특별함은 힐링을 판타지에서 찾지 않는다는 데 있다. 손글씨로 나눈 아날로그적 소통만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준다.

아프고 슬픈 기억 하얗게 지워주는 판타지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


마음 세탁소’의 문이 열리고, 창백하고 하얀 얼굴에 젓가락처럼 마른 몸, 까맣고 구불구불 긴 머리를 가진 여자 ‘지은’이 손님을 맞는다. 많이 봐야 40대로 보이는 얼굴이지만 그는 이미 수세기를 살아왔다. ‘지은’은 따뜻한 차를 내놓고, 손님은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상처를 하나둘 꺼내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끝나고 ‘지은’이 향하는 곳은 세탁실. ‘지은’은 손님에게 하얀색 티를 건넨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한다. “지우고 싶은 기억을 떠올리면, 티에 얼룩이 생겨나. 얼룩덜룩해진 옷을 세탁기에 돌리면 그때의 기억은 사라져.”

지난 3월 출간된 이후 국내에서 10만 부 이상이 판매됐으며, 영국의 대형 출판사 펭귄랜덤하우스에 10만 달러(약 1억3000만 원)의 높은 선인세를 받고 수출된 윤정은 작가의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북로망스)는 신비로운 세탁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힐링 판타지 소설이다. 가난에 시달려 꿈을 포기한 어린시절, 사랑했던 연인의 배신, 자식을 위해 몸 바쳐 보낸 청춘 등 각자의 삶을 닮은 이야기가 마음을 울린다.

바쁜 삶… 휴식과 자유에 대해 다시 고민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친근한 동네 서점과 실재할 것만 같은 ‘휴남동’. 황보름 작가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클레이하우스)는 대기업을 퇴사하고 서점을 차리게 된 30대 여성 ‘영주’가 이끌어 나가는 이야기다. 익숙한 공간을 중심으로 ‘평범한’ 인물들이 모여들어, ‘느슨한 연대’를 만든다. 중요한 건, 바로 ‘휴(休)’. 전자책 소설이 입소문으로 종이책으로 출간되고, 오랜 동안 베스트셀러를 점하고 있는 힘은 바로 그것. 인물들은 애써 무엇이 되려고는 하지 않아도, 애써 ‘쉬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디에선가 자신을 소진해 버린 이들은, 자신만의 속도를 찾아야, 삶의 의미를 회복한다는 걸 안다. 계속된 취업 실패로 알바를 시작한 민준, 되고 싶은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는 고등학생 민철, 비정규직을 던지고 서점에 조용히 앉아 수세미를 뜨는 정서…. 노력에도 임계점이 있음을 인정하는 인물들은 서로를 한계로 몰아붙이지 않는다. “속도를 더 내라고 닦달하는 세상의 소리로부터 물러난 공간” “좋은 사람들과의 의미 있는 대화”. 영주가 바라는 세상을 그린 소설은 잠시 인생의 불협화음 속에 있어도 염려하지 말라고 다독인다.

박동미·박세희 기자 pdm@munhwa.com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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