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전황을 바꾼 계기인 인천상륙작전이 진행된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앞쪽) 장군이 에드워드 아몬드(오른쪽) 10군단장과 도일(뒤쪽) 해군 소장과 함께 지휘함에서 작전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 오른쪽 위에 아몬드 장군이 외손자인 토머스 퍼거슨 미 육군 예비역 대령에게 남긴 친필 메모가 쓰여 있다.
6·25전쟁의 전황을 바꾼 계기인 인천상륙작전이 진행된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앞쪽) 장군이 에드워드 아몬드(오른쪽) 10군단장과 도일(뒤쪽) 해군 소장과 함께 지휘함에서 작전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 오른쪽 위에 아몬드 장군이 외손자인 토머스 퍼거슨 미 육군 예비역 대령에게 남긴 친필 메모가 쓰여 있다.


■ 한미동맹 70년, 새 미래로 간다
(3) ‘인천상륙’ 참모 활약·‘흥남철수’ 지휘한 미국 아몬드 장군 외손자 퍼거슨 예비역 대령

“동맹에 반대·부정적 주장하는
젊은층 일부 위험한 태도 걱정”

“1만4000여명 구출 흥남철수
외조부, 작전지휘 뒤 3성장군”
아몬드장군 자택 지하는 ‘워룸’
서재는 ‘6·25전쟁 기념관’ 방불


그레이트폴스=글·사진 서종민 기자 rashomon@munhwa.com

토머스 퍼거슨 미 육군 예비역 대령이 미국 버지니아주 그레이트폴스 자택의 서재 가운데 탁자를 가득 채운 외조부 에드워드 아몬드 장군의 훈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토머스 퍼거슨 미 육군 예비역 대령이 미국 버지니아주 그레이트폴스 자택의 서재 가운데 탁자를 가득 채운 외조부 에드워드 아몬드 장군의 훈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외조부 집 지하 공간에는 천장 전체에 한반도 입체 지도가 있었다. 한·미동맹을 더 강고하게 만들어주기를 신께 기도한다.”

지난 14일(현지시간) 토머스 퍼거슨(79) 미 육군 예비역 대령은 “한국과 미국은 더 강한 동맹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화일보·외교부·문화체육관광부 공동으로 한·미동맹 70년 기획취재를 위해 미국 버지니아주 그레이트폴스 자택에서 만난 그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하는 지난 1950년 12월 24일까지 약 열흘에 걸쳐 미 제10군단·한국군 제1군단, 피란민 1만4000여 명을 구출해낸 유엔군의 흥남철수작전을 지휘했던 에드워드 아몬드 당시 미 10군단장의 외손자다. 외조부 얘기를 하는 내내 추억에 잠긴 듯 옅은 미소를 유지하던 퍼거슨 대령은 한반도 현 정세와 한·미동맹 관련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은 굳은 표정이었다. 그는 “뉴욕에 있는 딸과 때로 논쟁을 벌인다”며 “딸에게서 듣기로 젊은층 일부가 한·미동맹에 반대하고 부정적 주장을 한다고 하는데, 그와 같이 위험하고 나쁜 태도가 걱정”이라고 말했다.

퍼거슨 대령이 인터뷰에 앞서 보여주고 싶다고 한 서재는 일종의 작은 6·25전쟁 기념관이었다. 벽면을 메운 책장은 전쟁 관련 서적으로 가득했고, 한가운데 테이블은 아몬드 장군의 전공을 기리는 훈장으로 채워졌다. 퍼거슨 대령은 중장 계급장을 가리키며 “외조부는 흥남작전을 지휘하고 나서 3성 장군이 됐다”고 했다. 그가 “중요한 사진이 한 장 있다”며 취재진을 이끈 곳에는 아몬드 장군이 인천상륙작전 당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 등과 함께 있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의 가장자리에는 아몬드 장군 필체로 ‘To Tom Ferguson. General MacArthur, Admiral Doyle and I view the end Incheon landing, Korea 15 Sept 1950 7am, from The Command Ship in Mount McKinley’(퍼거슨에게. 1950년 9월 15일 오전 7시, 매킨리 지휘함에서 맥아더 장군, 도일 소장 그리고 내가 인천 상륙전을 지켜보고 있다)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퍼거슨 대령에 대한 아몬드 장군의 애정은 1965년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학교장을 대신해 외손자의 졸업장을 수여했을 만큼 각별했다.

퍼거슨 대령은 “내가 외조부를 인터뷰했던 당시 그가 82살, 지금 내가 비슷한 나이”라며 “이 나이에 한국에서 온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라고도 했다. 그의 외조부 인터뷰는 기록 차원에서 상부 지시에 따라 14시간 동안 진행됐다. 인터뷰 장소였던 미 앨라배마주 아몬드 장군 자택의 지하 공간은 ‘워룸’(war room)으로 명명됐다. 퍼거슨 대령은 “워룸은 천장 전체가 한반도 지도였는데, 외조부는 등고선대로 높낮이가 달랐던 그 입체형 지도를 한 곳씩 짚으면서 대답을 이어갔다”며 “6·25전쟁과 한국은 우리 가족에게 의미가 크다”고 했다.

퍼거슨 대령이 한국을 처음 찾은 때는 인천상륙작전으로부터 2년 전이었고, 당시 4살이었다. 군인으로서 일본 도쿄(東京) 근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되돌아가던 의부(義父)가 인천항을 들른 것이 계기였다. P-38 전투기 조종사였던 친부는 퍼거슨 대령이 1살이던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노르망디상륙작전 중 전사했다. 외조부와 친부를 따라 육군 혹은 전투기 조종사를 지망했으나 퍼거슨 대령은 웨스트포인트에서 전차 파괴 훈련 중 망막을 다쳐 정보장교의 길을 걸었다. 1986년 장교 전문성 개발(OPD·Office Professional Developoment)을 담당해 두 번째로 한국을 찾아 2년간 서울 용산, 경기 의정부·평택 등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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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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