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 빌딩에 반쯤 갇혔더라도 햇빛은 환하게 빛나요.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낀 산도 우리와 함께하는 건 마찬가지고요. 이런 단편적인 모습의 자연을 담는 게 동시대적 산수화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든 거죠.”
이정배(49)는 동양화가다. 조각뿐 아니라 가구도 만들고 한국에서 가장 까맣고 깊은 색깔이라는 ‘이정배 블랙’이란 물감까지 만들 정도로 재주가 많지만, 여전히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만 보면 가슴이 뛸 만큼 산수화에 진심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옛 산수화와는 여러모로 다르다. 풍경을 담는 대신 썰어냈기 때문이다. 서울 아라리오뮤지엄에서 진행 중인 그의 개인전 ‘문지르고 끼이고 빛이 나게’에 걸린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기하학적 형태를 띠고 있다.
어두컴컴한 전시장 한 켠에 반쯤 잘린 레몬 같은 작품엔 ‘찬란한 햇빛’이란 이름이 붙었다. 고층 빌딩 뒤로 지고 있는 태양의 빛이 회절해 건물 위로 비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그 앞엔 커다란 녹색 막대 모양의 구조물이 서 있는데, 작품명이 ‘빛의 산’이다. 빌딩 숲 사이에 숨은 산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단편적인’ 산이다. 지난달 20일 전시를 앞두고 만난 작가는 “부산을 들렀는데 센텀시티 빌딩 사이에 낀 산의 모습이 문득 눈에 들어오더라”며 “산 전체나 자연을 조망한 게 과거 산수화라면 지금은 이런 단편적이고 판판한 모습이 현대적인 게 아닐까 싶었다”고 했다.
우연히 외친 ‘유레카’는 이정배의 작품세계를 180도 바꿨다. 2005년 문화일보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후 10년 넘게 날이 서 있던 이정배의 시선이 누그러졌다. 그는 “그간 도시의 무분별한 개발에 잠식당한 자연을 비판적으로만 봤던 사고를 긍정적으로 전환했다”면서 “산수화는 자연이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닌 인간과 합자연의 세계임을 다시 발견한 것”이라고 했다.
전시장 비밀의 공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손바닥만 한 ‘금의 인왕산’과 ‘은의 인왕산’은 21세기 이정배의 눈에 담긴 인왕산이 고스란히 표현된 작품이다. 커다란 빌딩 사이 빼꼼히 머리를 내민 인왕산의 능선을 24K 순금 23돈(86g)과 순은을 부어 만들었다. 자신이 생각한 ‘자연의 기하학’을 완성해서일까. 재료비만 수십 배가 차이 나는 데도 작가가 매긴 두 작품의 가격이 같다는 게 미학적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지점이다. 전시는 내년 2월 11일까지.
유승목 기자 mo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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