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논설위원

영국 BBC 카디프 콩쿠르 한국인 최초 우승자인 바리톤 김기훈(32)이 지난 4일 서울 예술의전당 리사이틀에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가곡을 집중 선보였다.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은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의 대표적 낭만주의 작곡가다. 국내외에서 자주 연주되는 그의 피아노협주곡이나 교향곡과 달리, 가곡은 빼어난 서정성과 아름다운 멜로디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어의 높은 장벽 탓에 대중적으로 사랑받지 못해온 게 사실이다.

김기훈이 이번 음악회에서 ‘꿈’ ‘아름다운 여인이여 노래하지 마오’ ‘이제 우리는 만났네’ 등 라흐마니노프의 가곡 9곡을 부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롤 모델이었던 러시아 바리톤 드미트리 흐보로스톱스키(1962∼2017)에게 헌정하는 무대다. 음악회 타이틀을 ‘흐보로스톱스키에 대한 오마주’로 정한 배경이다. 김기훈은 언론 인터뷰에서 “나의 우상과 한 무대에 서는 게 꿈”이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6년 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흐보로스톱스키가 잘 불렀던 곡을 부름으로써 ‘음악적 만남’을 한 셈이다. 두 사람은 폭발적인 성량에 벨벳 같은 음색을 지닌 카디프 콩쿠르 우승 바리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 김기훈은 자칭 ‘곡성 촌놈’인데, 흐보로스톱스키도 변방 크라스노야르스크 출신이어서 ‘시베리아의 호랑이’란 별명이 따라 다녔다.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오네긴’이 흐보로스톱스키의 아이콘이었던 것처럼 김기훈도 이 오페라 아리아를 유려하게 부른다.

김기훈은 오는 26일 영국 무대에 데뷔한다. 흐보로스톱스키가 1989년 카디프 콩쿠르 우승 후 런던 최고의 위그모어홀에서 첫 음악회를 가짐으로써 오페라가수의 길에 접어든 것처럼, 그도 2021년 카디프 콩쿠르 우승 후 처음으로 라흐마니노프 가곡으로 위그모어홀 무대에 선다. 영국인들에게 ‘제2의 흐보로스톱스키’로 인식될 만하다.

더구나, 이 음악회는 윤석열 대통령의 20∼23일 영국 국빈방문 뒤 열린다는 점에서 김기훈은 영국의 K-클래식 붐 주역이 될 수도 있다. 카디프 콩쿠르 후 흐보로스톱스키가 30년 가까이 영국과 러시아의 예술적 가교 역할을 했듯, 김기훈도 찰스 3세 시대 한·영 관계를 음악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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