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구자의 서재

사랑은 자해고 취향은 저주다. 함께 아이돌 덕질을 하는 친구와 나눈 문장이다. 이 문장에는 다양한 감정이 포개어져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일종의 억울함이다. 내가 쟤를 사랑하기로 선택한 게 아니라, 가만히 있던 나를 쟤가 이렇게 만들어 버렸는데. 그래서 취향은 저주고, 저주에 걸린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아이돌 팬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는 이희주 작가의 소설 ‘환상통’(문학동네)은 사실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돌 ‘민규’를 함께 좋아하는 ‘덕질 메이트’ m과 만옥, 그리고 만옥을 짝사랑하는 한 사람. 이들은 각각 책의 1부, 2부, 3부의 화자로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그 중심에는 누구보다도 만옥과 그의 마음이 있다. 이 책은 만옥이라는 팬의 마음을 통해 덕질에 대해, 또한 덕질을 통해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팬의 마음들을 먼저 보여준 이후에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한 짝사랑을 보여주는 책의 구성은 어떤 마음이 더 ‘진짜’인지 질문하는 듯하다.

아이돌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고, 이따금씩 닿을 수 있는 곳으로 잠깐씩 내려와서 빛나는 순간을 선사한다. 그것이 팬사인회든, 생일카페든 간에. 팬은 그 빛을 두 눈에 가득 머금고 잔상을 본다. 그러나 빛이 눈에 남긴 흔적은 눈으로 따라가려고 해도 결국 똑같은 위치에 있다. 그것은 저 앞에 있는 게 아니라, 내 눈에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래 사람의 마음이란 다 그런 것이 아닌가? 우리는 무언가를 마음에 가득 품고, 자신이 품은 것을 계속해서 들여다보고 노려보면서, 사랑이란 것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환상통’은 사랑에 대해, 나아가 마음에 대해 진짜와 가짜를 나누고 가짜 사랑과 가짜 마음을 헛것으로 치부하는 세상에 이렇게 외치는 것만 같다. 사랑이란 원래 헛것이고, 그 아름다운 헛것에 매혹되어 닿을 수 없는 곳에 달려드는 것은 아이돌 팬이든 옆 사람을 짝사랑하는 사람이든 마찬가지인 거라고. 모든 사랑은 너무나도 아픈 헛것, 환상통이라고.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란 무엇일까. 좋아하는 마음은 내가 계속해서 무언가를 하게 한다는 점에서 뚜렷이 실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내가 놓는 순간 사라지기도 한다. 뚜렷이 실재하지만 어느새 사라져 있기도 한 것, 그래서일까, “가짜 눈을 맞으며 나는 아름다운 것엔 언제나 속아도 좋다고 생각했다.”(128쪽)

안희제 작가·문화연구자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